〈재일동포문학예술의 계승자, 혁신자〉각지 문예동 맹원들②

《조선신보》2022.03.03

문예동은 일본 방방곡곡에 흩어져있던 문학예술가들이 집결하여 1959넌 6월 7일에 결성된 주체적이며 애국적인 첫 문예조직이다. 이역땅에서도 조국과 민족을 위한 곧바른 한길에서 문학예술을 창조하여온 각지 문예동 맹원들의 열정과 헌신을 한달에 1번 소개해나간다.(협력=문예동중앙)

《차례진 자리에서 제할바를 한다》/문예동오사까 문학부 진승원씨

문예동오사까 문학부의 진승원씨는 40년간 도꾜, 오사까의 우리 학교들에서 교단에 섰다.

중고급학교 국어교원을 맡아하게 되면서 문예동 문학부의 모임에 참가하게 되였다. 교육수준을 높이는데 도움이 될것이라는 동료의 권유를 받은것이 계기점이였다.

운동회에서 씩씩하게 행진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고 지은 《서른한번째 운동회》를  첫출발로 자라나는 후대들의 모습과 동포들의 생활을 엮은 시를 창작하였다.

《자그마한 씨앗을 글에 담는다.》-《문학부의 모임에서 처음 들은 이 말이 나의 마음을 틀어잡았습니다. 어렵고 힘들기도 하고 때로는 나를 괴롭히지만 문학부모임이 진행되는 날을 손을 꼽으며 기다리는 자기가 우습기도 합니다.》고 그는 말한다.

그에게 있어서 문예동이 걸어온 로정은 우리 문학의 힘으로 동포들을 묶어세우고 재일조선인운동발전에 적지 않게 기여하여온 선대들의 정열과 헌신의 나날이다.

그 뜻을 이어갈 대오속에 함께 서서 창작사업, 보급사업에 떨쳐나서는 긍지는 높다.

그리고 두겹, 세겹으로 들이닥치는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애족애국의 마음을 키우고 자기 희망과 재능을 꽃피우는 제자들, 상부상조의 미풍을 꽃피우는 동포들의 소식은 언제나 그에게 큰 힘을 북돋아준다.

그는 《말이자 곧 민족입니다. 우리 말을 무기로 삼아 사업한다는것이 얼마나 보람찬 삶인지를 늘 가슴에 새기고 〈풋내기 시인〉이라는 초심으로 창작사업에 안깐힘 다해나가겠습니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비록 교육의 제일선은 물러섰지만 가만있을수는 없습니다. 차례진 자리에서 제할바를 한다. 그것이 지금 내 앞에 뻗은 길입니다.》

희망을 안고 분투의 나날/문예동도까이 음악부 홍성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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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오사까조선가무단출신인 어머니의 노래소리, 아버지의 장고소리를 들으면서 자랐다는 문예동도까이 음악부의 홍성미씨. 그의 생활속에는 언제나 우리 음악, 우리 노래가 있었다. 부모들처럼 음악의 길에서 마음껏 재능을 꽃피울 결심을 안고 조선대학교 음악과를 졸업하여 교원생활을 보냈다.

결혼후 3명의 아이들을 키우는 바쁜 나날을 보내던 어느날 문예동 음악부에서 정기적으로 실기발표회를 조직하고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예술인으로서 무대에 서고싶다는 꿈이 되살아나 그의 가슴은 설레였다.

다시한번 우리 노래를 부르고싶다는 일념으로 그는 문예동활동을 시작하였다. 오래동안 가슴속에 담아두었던 열정이 또다시 싹튼 순간이였다.

처음으로 차려진 무대는 지역의 학교행사였다. 그런데 막상 무대에 서보니 후회와 반성, 안타까움만이 앞섰다. 그는 전문가에게서 본격적인 개별지도를 받으며 기술기량을 닦았다.

《Web우리 노래자랑 독창경연》에도 도전하였으며 작년 12월 23일에는 신형코로나로 인하여 연기되여있었던 《제3차 문예동도까이 음악부 실기발표회》에서 노래와 피아노연주를 피로하였다.

《나의 노래는 아직도 성장과정에 있다.》고 그는 자신을 고무하면서 훈련의 나날을 보낸다.

《앞으로도 계속 열정을 안고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가닿는 노래를 부를수 있도록 분투하겠습니다.》

《아름다운 생활을 글에 담아》/문예동효고 문학부 김대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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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부에서 함께 활동해보지 않겠니?》

히가시고베초중에서 사업하게 되면서 2년도 채 지나지 않았던 어느날 당시 문학부장이 한 말이다.

워낙 문학을 좋아하고 글쓰는것을 즐기는 그는 그자리에서 《옛!》 하고 선뜻 대답하였다.

당시 문학부는 맹원수가 5명도 안되였다. 그러나 한달에 1번 모임을 가지고 학습을 꼭꼭 진행하고있었다.

그는 여기에서 문학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창작하여야 하는가에 대하여 실천적으로 배웠다. 다른 맹원들과 술잔도 기울이면서 민족교육의 앞날에 대하여 그리고 동포사회의 미래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꿈을 현실로 꽃피우자고 함께 다짐하였다.

그 결심대로 문예동효고 문학부는 수십편이나 되는 작품을 창작하였으며 문예동효고지부 기관지인 《문예효고》도 발간하였다. 또한 화술기량을 발표하는 공연에도 출연하였으며 특히 단독공연 《이 품속에서》는 많은 동포들에게 웃음과 감동을 안겨주었다.

학생구연대회 연극각본을 10여편 창작하여 그중 2편이 우수작품무대에 올랐던것은 문학부에서 창작활동을 꾸준히 벌린 결과일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문학부에서의 활동기간은 23년을 넘었다.

젊은 맹원들도 가입하여 문학부는 한층 활기를 띠고있다.

《문학은 인간학입니다. 문학에는 그 시대에 사는 인간이 그려집니다. 정열을 바쳐 동포들의 진실하고 아름다운 생활과 모습을 글에 담을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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