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의품에서자란지휘자김병화선생을추모하여

2021.04.11

〈기고〉조국의품에서자란지휘자김병화선생을추모하여/리철우(윤이상음악연구소부소장, 이전문예동중앙음악부장)

조선중앙통신에 의하면 김정은원수님께서는 김일성상계관인이며 인민예술가인 국립교향악단 창작창조부 김병화고문의 서거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시하여 화환을 보내시였다. 화환은 3월 23일 고인의 령전에 진정되였다. 절세위인들의 품속에서 예술적재능을 마음껏 꽃피우며 관록있는 예술창조집단의 수석지휘자로 성장한 고인은 관현악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 《그네뛰는 처녀》, 《아리랑》을 비롯한 수많은 작품들을 훌륭히 지휘형상함으로써 주체교향악발전에 이바지하였다.

김병화지휘자를 추모하는 윤이상음악연구소 부소장이며 이전 문예동중앙 음악부장 리철우(음악프로듀서)씨의 기고를 소개한다.

김병화지휘자는 절세위인들의 품속에서 예술적재능을 마음껏 꽃피운 관록있는 예술창조집단의 수석지휘자였다.

조선국립교향악단 수석지휘자이자 인민배우, 김일성상계관인인 김병화선생의 부고에 접하여 나의 음악선배이자 형의 음악친구였던 선생을 추모하여 그의 삶을 회상해 본다.

지휘자 김병화선생의 부모는 일제식민지시기에 살길을 찾아 고향 경상남도 김해에서 일본으로 건너왔다. 1935년 7월 1일 오사까에서 출생한 김선생은 고베로 이사하여 고베조선학교에서 학생시기를 보냈다. 당시 고베조고 1기생으로 선생과 함께 학교를 다닌 선후배들이 지금도 많다.

학생시기부터 음악적재능을 발휘한 선생은 청년합창단 지휘, 민청문공대 반주자로 활동하였다. 음악을 사랑한 선생은 음대로 진학하길 희망했으나 당시의 생활이 일본정부의 민족교육차별과 재일동포의 힘든 경제형편으로 하여 그 뜻을 이루기는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1955년 도꾜로 살림을 옮긴 선생은 피아노를 배우면서 関鑑子씨가 이끄는 중앙합창단 피아노 반주자로 활동하고 三浦浩씨에게서 피아노를 배웠다.

당시 유명한 일화가 있다. 김선생은 三浦씨의 제자중 한사람으로 공연에 출연하게 되였다. 하지만 가난한 형편으로 겉옷도 없이 와이샤쯔만 입고 출연한 김선생은 피아노로 《바르도크》(웽그리아 작곡가의 작품)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공연을 보고있던 손님들은 모두 김선생을 보고 비웃었다. 그러나 三浦선생은 연주회가 끝난 후 《음악을 할려면 음악을 사랑하는것부터 배우라. 사람의 옷차림이나 겉보기가 과연 피아노의 옥타브 중 어느 한 음이라도 대신하여 낼수 있겠는가? 김병화는 반드시 유명한 음악가가 될것이며 자기 민족의 재능을 사람들에게 인정시킬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김병화선생은 1960년에 조국에 귀국하여 평양음악대학 지휘과에 입학, 1964년 대학을 졸업하여 국립예술극장 지휘자로 취임하였다. 음악무용극 《밝은 태양아래》, 가극 《콩쥐팔쥐》, 무용 《고난의 행군》, 《조국의 진달래》 등을 지휘하였다.

1969년 국립교향악단 지휘자로 임명되여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 《내고향의 정든 집》, 《아리랑》, 교향곡 《피바다》, 《꽃파는 처녀》, 피아노협주곡 《조선은 하나다》 등 수많은 조선의 명곡을 훌륭히 지휘하여 주체교향악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조선국립교향악단의 일본 첫 공연시의 김병화지휘자(사진은 모두 필자제공, 1992년 6월 1일, 도꾜예술극장)

특히 1982년부터 윤이상음악연구소에서 정기적으로 가을에 시작한 《윤이상음악회》에서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 교성곡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를 비롯한 윤이상작품과 베토벤, 챠이꼽스끼, 모짜르트, 브람스, 라벨 등 유럽고전작곡가들의 작품을 지휘하기도 했다. 뿐만아니라 로씨야, 중국,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아프리카 등 세계 여러 나라를 방문한 조선예술단의 지휘자로 조선음악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1972년 공훈예술가칭호를, 1986년 인민예술가칭호를 수여받았다.

국가나 민족단위에서 음악발전의 선도적인 지휘자의 역할은 매우 크다.

음악에 관한 격언에 《100명의 음악가보다 1명의 지휘자를!》이란 말도 그런 의미에서 나온것이다.

공화국창건이래 지휘자 계보를 간단히 살피면 일제식민지시기 일본이나 중국에서 음악을 배워 조국에 돌아와 지휘자가 된 인민배우 김기덕선생(1921-1991, 1949년국립교향악단 지휘자, 단장), 인민배우 박광우선생(1926-1983, 《김일성장군의 노래》 초연 지휘, 음악무용서사시 지휘)들이 지휘계의 1세대가 된다. 2세대로는 조선 제일의 지휘자로 천재적인 평가를 받은 허재복선생(1931-1977)이고 3세대가 김병화지휘자의 세대이다. 그외 첫 녀성지휘자이며 《금상산의 노래》를 재일예술인들에게 전습한 인민배우 조정림선생(1949-)과 제8차 까라얀명칭국제콩쿨에서 1등 없는 2등을 수상한 인민배우 김일진선생(1956-) 등이 지휘계를 계승하고있는것으로 알려져있다.

1986년 9월 《와르샤와의 가을》 음악축전에서는 김지휘자에 대해 《그의 지휘에서의 특징은 매우 섬세한것, 즉 정확성과 리듬감이다. 이것이 조선교향악단에 대한 그의 뚜렷한 모습으로 되며 그것으로써 김지휘자는 누구보다도 강한 지휘통솔력을 가진다.》라고 국제적인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나는 평양에서 오래간만에 만난 김지휘자에게 《오랜 연주생활에서 인상깊은것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봤다. 그때 그가 대답한것은 제일 감동하고 인상적인것은 1992년 효고동포대음악회 《7,000명이 부르는 통일의 노래》지휘와 상봉모임이였다고 하였다.

생사고락을 같이한 효고동포들과의 상봉은 자기가 나서자란 곳이 이역이지만 인맥도 있고 그에 따른 정도 생기고 결과 지맥도 형성되는 곳이라 공감했다.

당시 공연을 본 동포들만이 아니라 공연에 출연한 동포들도 김지휘자를 일본에 보내준 조국에 고마움을 느꼈을것이다.

공연을 마치고 흘린 한량없는 기쁨의 눈물은 재일동포가 조국에서 유명한 음악가가 되였다는 뿌듯함이 눈물의 절반이상이라 할수 있다.

재일동포들이 조국에 귀국하여 음악적재능을 발휘한 성공적인 례는 많지만 그중 대표적인 인물의 한사람이 지휘자 김병화선생이다.

지휘자는 음악연주에서 선도적역할을 하는 직업이지만 그가 조국의 배려로 자신의 재능으로 우리 나라 음악발전에 이바지할수 있었다는것은 재일동포들의 자랑이며 우리 음악가의 긍지라 할수 있다.

재일동포음악인들의 념원인 《민족을 위한 음악》발전에 이바지할수 있는 그런 인생을 보낼수 있었다는것 또한 아무도 할수 없는 일이고 김지휘자만이 지닐수 있는 영광이라 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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