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력사를 가지고있는 조선의 가무

주체111(2022)년 1월 11일 

오랜 력사를 가지고있는 조선의 가무​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본래 가무는 인민의 로동생활과 밀접히 결합되여 발전하여온 가장 생활적인 예술형식의 하나입니다.》

반만년의 오랜 세월을 이어온 우리 조선민족의 력사는 뛰여난 슬기와 재능이 어린 수많은 문화적재보를 창조해온 자랑스러운 력사이다. 우리 선조들이 남긴 우수한 가무유산을 통해서도 그것을 잘 알수 있다.

가무는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추는 대중적인 민속예술형식으로서 오랜 전통을 가지고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B.C. 3000년경에 해당한 청동기문화층에서 벌써 뼈피리, 청동방울을 비롯하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데 리용되는 관악기와 타악기유물들이 발굴되였다. 고대시기부터 우리 선조들은 가무를 무척 좋아하였다. 그것은 고조선, 부여, 진국사람들이 가무를 즐기였다고 한 이웃나라의 력사기록을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삼국시기에 이르러 가무는 더욱 성행하였다. 옛 문헌 《삼국지》에는 고구려사람들이 《가무를 즐기는데 나라안의 읍락들에서 밤이면 남녀가 무리지어 노래하며 즐긴다.》라는 내용이 씌여져있고 고구려시기의 무덤벽화들에도 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노래하며 춤을 추는 모습이 형상되여있다. 신라, 백제, 가야에서도 가무는 널리 일반화되여있었으며 많은 가무유산들이 창조되였다. 력사기록에 남아있는것만 해도 백제의 《정읍》과 신라의 《회소춤》, 가야의 《영신가》를 비롯하여 그 가지수가 적지 않다.

발해에서 가무는 보다 발전하였다. 발해의 민속가무 《답추》만 놓고보아도 춤을 잘 추고 노래 잘 부르는 사람들을 앞세우고 숱한 군중이 그뒤를 따르면서 노래와 춤가락을 이어받는 식으로서 이것은 이 시기 가무가 그 구성형식에서 보다 큰 발전을 이룩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고려와 조선봉건왕조시기에 가무는 사람들에게 창조의 희열을 주고 로동의 성과를 높이며 단합력과 애국심, 반침략투쟁정신을 고조시키는 수단으로 널리 대중화되였다. 이 시기들에 가무의 지방적특성이 강해졌는데 대표적인것은 함경도의 《돈돌라리》, 중부지방의 《닐리리》, 강원도의 《회양닐리리》, 경상도의 《옹헤야》 등이다.

우리 민족의 가무는 그 력사가 오랠뿐아니라 예술형상적으로도 우수하다.

우리 민족의 가무는 각종 로동생활과 반침략, 반봉건투쟁, 인정세태, 무병장수, 민속유희 등 다양한 생활을 반영하고있다. 또한 률동성이 풍부하고 형상표현력이 강하다. 예로부터 음악적감수성이 높고 정서적인 우리 민족이 창조한 가무들은 그 어느것이나 다 정서가 진하고 흥취나는것들이다.

우리 민족의 가무는 특히 장단이 좋다. 우리 선조들은 예로부터 가무에서 물장고라는 류다른 반주수단을 즐겨 리용하였다. 물이 찬 동이나 양푼에 바가지를 엎어놓고 치면 물장고이다. 물장고는 소리가 예리하지 않고 그 울림의 여운이 길기때문에 가무에 적합하였다. 웅글지고 구성진 울림으로 특색을 돋구어주는 물장고는 세계 그 어느 민족에게서도 찾아볼수 없는 우리 민족고유의 가무반주수단이였다.

가무는 우리 인민들의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정서생활수단이였다. 대체로 민속명절들이나 경사로운 날에 가무놀이를 진행하는것이 보통이였던 다른 민족들과는 달리 우리 민족은 일상생활에서 가무를 즐기면서 살아왔다. 이른아침 논벌로 일하러 나갈 때나 집으로 돌아올 때에도 가무놀이를 즐기였다. 모내기, 김매기와 같은 농사일을 하면서도 장단을 치고 노래를 부르며 일에 성수를 냈을뿐아니라 휴식참에도 가무로 흥을 돋구며 피로를 풀었다. 무술훈련도중이나 체육경기를 할 때에도 항상 흥취나는 가무를 펼쳐놓으며 즐기군 하였다.

이처럼 가무를 즐기는 우리 인민들의 풍습에 대해 19세기 우리 나라를 돌아본 한 외국인은 《조선기행》이라는 자기의 글에서 《아시아민족들중 조선사람보다 음악에 대하여 열렬한 애착심을 가진 민족은 없을것이다.》라고 썼다.

우리 인민들의 반침략투쟁에서도 가무는 큰 역할을 놀았다.

우리 인민들은 멸적의 기상안고 외적을 쳐부시는 싸움터로 출전할 때에도 가무로 사기를 돋구었다. 심지어는 외적들과의 치렬한 전투과정에도 농악을 울리며 노래춤판을 벌려놓아 적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임진조국전쟁시기에 창작된 《강강수월래》, 《쾌지나 칭칭나네》 등은 그 대표적인것들이다.

이처럼 우리 민족의 유구한 력사와 더불어 전해져온 락천적이며 정서가 풍부한 가무는 오늘 민족전통을 귀중히 여기는 조선로동당의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훌륭히 계승발전하고있다.

《강강수월래》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인민은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전통을 가진 슬기로운 인민입니다.》

가요 《강강수월래》는 임진조국전쟁시기 전라도지방에서 퍼져 남해안일대에서 널리 불리워진 륜무가형식의 민요이다.

《강강수월래》라는 말뜻은 오랑캐(왜적)들이 물을 건너온다 또는 주위를 경계한다는 뜻으로 해석되고있다.

초기 이 민요는 주로 녀성들이 바다가 곳곳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왜적들을 위협하며 원쑤놈들이 쳐들어오는것을 경계하기 위하여 불렀으나 그후 정월보름이나 한가위 같은 달이 밝은 밤에 마을처녀들이 서로 손을 잡고 돌아가면서 노래부르고 춤추는 민속적인 년중놀이형태의 륜무가로 발전하였다.

이 민요는 지방에 따라 여러가지 변종들이 전해지고있으나 한결같이 왜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려는 우리 인민들의 애국심과 행복한 생활에 대한 지향을 반영하고있다.

중모리장단을 타고 서서히 흐르는 느린 부분과 그에 대조되는 빠른 부분으로 구성된 선률은 먹임소리와 받는 소리를 련속 되풀이함으로써 노래의 평이성과 간결성을 잘 보장하고있다.

민요 《강강수월래》는 담고있는 사상과 독특한 형상적특징으로 하여 오늘도 우리 인민들속에서 널리 불리워지고있다.

민족가무 《쾌지나 칭칭나네》​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력사유적유물들은 우리 선조들이 투쟁과 창조적활동을 통하여 이룩한 귀중한 유산이며 후세에 길이 전해갈 민족의 재부입니다.

찬란한 문화와 력사를 가진 우리 민족은 자기 민족을 대표하는 문학예술작품들을 수많이 창조하고 전해왔다.

그중에는 가무 《쾌지나 칭칭나네》도 있다.

《쾌지나 칭칭나네》는 왜적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군사들과 인민들의 기쁨을 노래와 춤으로 엮은 놀이이다.

임진조국전쟁시기 어느 한 싸움에서 침략군 두목이였던 가또 기요마사(가등청정)가 된벼락을 맞고 패주하게 되였다.

이때 인민들과 병사들이 《쾌재라! (통쾌하도다) 청정이 나가네》라고 승리의 환성을 올리면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그후 이 노래는 우리 인민들의 힘찬 승리의 개가로 되여 널리 불리워지게 되였으며 이 과정에 《쾌지나 칭칭나네》로 변화되고 가무놀이로 발전하였다.

이 노래의 가사는 바다와 륙지에서 왜놈을 쳐부시고 우리 군대가 승리할것을 바라는 인민들의 절절한 애국적념원과 싸움에서 승리한 환희를 긍지높이 노래하고있다.

오래전부터 우리 인민들은 새해 만풍년을 념원하여 바줄당기기를 진행하여왔다.

애기줄당기기에 이어 청장년들의 바줄당기기가 시작되였는데 이에 앞서 마을사람들은 자기편의 기세와 놀이의 흥을 돋구어주기 위하여 농악을 울리고 《쾌지나 칭칭나네》를 부르면서 제각기 흥이 나는데로 춤을 추었다.

또한 추석날밤이나 화창한 봄날 화전놀이를 하면서 부녀자들은 한데 모여앉아 《강강수월래》와 《쾌지나 칭칭나네》를 느린 속도로 부르며 그에 맞추어 춤을 추기도 하였다.

《쾌지나 칭칭나네》는 일정한 구도를 가지였다.

이 춤의 특징적인 동작은 제자리에서 전주르며 두팔을 엇바꾸어 앞으로 미는 동작인데 어깨춤동작이 동반되여 매우 흥겨운 감을 준다.

이밖에 곱디뎌 걸으면서 두팔밀기동작, 가벼운 굴신을 배합하면서 보통걷기와 팔뿌리치기 등이 있다.

《쾌지나 칭칭나네》춤의 이러한 동작들은 비교적 단순하지만 여러 사람들이 원을 짓고 돌아가면서 춤방향을 바꾸거나 팔을 내미는 동작들을 각이한 위치에서 진행함으로써 률동이 다양한 감을 준다.

우리 인민들의 락천적인 생활감정이 반영되여있는 《쾌지나 칭칭나네》는 정월대보름날과 같은 명절날뿐아니라 일하다 쉴참에 그리고 집단적인 경기와 놀이를 할 때에도 널리 진행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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