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기악작품으로 생을 빛내인 작곡가 윤충남

명기악작품으로 생을 빛내인 작곡가 

– 작곡가 윤충남의 창작생활을 놓고 –

김연규

우리 당의 품속에서 자기의 재능을 마음껏 꽃피우며 주체문학예술의 화원을 빛나게 장식해온 전세대 문예인들가운데는 주체기악음악발전에 뚜렷한 자욱을 새긴 작곡가 윤충남도 있다.

그는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피아노협주곡들을 창작한 재능있는 작곡가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피아노협주곡 <조선은 하나다>가 좋습니다.》

윤충남은 가요 《조선은 하나다》(성동춘 작곡)를 주제곡으로 하여 첫 피아노협주곡 《조선은 하나다》를 훌륭히 창작하였으며 련이어 피아노협주곡 《결전의 길로》를 창작하여 일찌기 인민들의 사랑을 받는 기악음악창작가로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그가 두개의 피아노협주곡들을 훌륭히 창작할수 있은것은 그가 지닌 높은 피아노연주기술과도 관련되여있다.

피아노협주곡은 높은 피아노연주기교들을 요구한다.

우리 나라의 경우만 놓고보더라도 시대의 기념비적명작인 피아노협주곡 《김정일동지께 드리는 노래》를 비롯하여 《조선은 하나다》, 《결전의 길로》, 《백두산의 눈보라》, 《번영하라 조국이여》 등을 내놓은 창작가들은 례외없이 피아노연주수준이 높고 피아노음악에 능통한 음악가들이였다.

세계음악사를 거슬러보아도 《피아노의 시인》이라고 불리우는 뽈스까작곡가 쇼뺑이나 《피아노의 마술사》라고 불리우는 마쟈르작곡가 리스트와 유명한 피아노협주곡을 내놓은 라흐마니노브를 비롯한 수많은 작곡가들은 거의나 다 피아노의 명수들이였다.

윤충남은 1945년2월 일본 가나가와현에서 출생하여 소년시절을 보내고 18살에 귀국하였다.

귀국후 그는 처음에 함흥경제전문학교(당시)에 다녔는데 이것은 그의 희망이 아니였다.

아버지는 아들이 음악을 공부하였으면 하는것이 소원이였고 윤충남자신도 음악을 좋아하였다.

은혜로운 조국은 귀국한 한 청년의 소중한 꿈과 희망을 귀중히 여기여 그를 함흥예술전문학교(당시)에서 마음껏 음악공부를 하도록 해주었다.

여기서 그는 처음에 색스폰으로 음악공부를 시작하였는데 그후에는 피아노공부로 방향을 돌리게 되였다. 그러나 이 학교에는 피아노를 능숙히 배워줄 교원이 없어 자습으로 피아노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는 피아노공부에 필요한 악보와 레코드판, 책들을 모두 걷어들이고 열심히 음악을 듣고 탐독하면서 피아노연주실력을 더욱 높여나갔다.

결과 그는 두해만에 베토벤의 피아노쏘나타 《열정》을 훌륭히 연주할수 있었다.

피아노공부를 늦게 시작하였지만 기어이 성공하리라는 그의 결심은 어릴적부터 피아노를 친 학생들의 수준을 릉가하는 정도에 이르게 되였다.

그후 윤충남은 더 높은 목표와 커다란 포부를 안고 로동생활속에서 작곡실력을 갖추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여 평양음악무용대학(당시)에 입학하였다.

1971년 평양음악무용대학 작곡학부를 최우수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철도성예술단(당시)과 중앙예술선전대(당시) 작곡가로, 그후 중앙문화회관(당시) 작곡가로 보람찬 창작의 활무대에 나서게 되였다.

이 시기 그는 피아노협주곡 《조선은 하나다》를 창작하였다.

노래 《조선은 하나다》를 주제로 하여 피아노협주곡을 창작하게 된데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고향을 남쪽에 둔 그의 아버지는 한시도 조국통일에 대해 잊어본적이 없었다.

귀국하는 아들에게 통일조국을 위해 무엇인가 일을 해야 한다고 당부하시던 아버지의 말씀이 그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던것이다.

그는 자기가 할수 있는것은 노래 《조선은 하나다》를 가지고 조국통일주제의 힘있고 절절한 피아노협주곡을 창작하는것이라고 생각하였다.

1970년대초는 위대한 장군님의 현명한 령도밑에 문학예술분야에서 일대 혁명이 일어나던 시기였으며 이때 우리 식의 우수한 기악작품들도 창작되였다.

그러나 그 시기 창작된 피아노협주곡은 종래의 낡은 기악음악창작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심중한 결함으로 하여 진통을 겪고있었다.

당시 어느 한 작곡가가 창작한 피아노협주곡 《김일성원수께 드리는 노래》가 바로 그러하였다.

이러한 실태를 헤아리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우리는 피아노협주곡같은 음악형식도 철저히 우리 식으로 하여야 한다고 다시말하여 서양음악형식을 받아들이는 경우에도 조선사람의 정서와 감정에 맞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그이의 교시를 좌우명으로 삼은 윤충남은 위대한 장군님께서 의도하시는 피아노협주곡을 기어이 창작하리라 마음다졌다.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들은 대학을 갓 졸업한 햇내기작곡가가 어떻게 피아노협주곡을 창작하겠는가고 하면서 전혀 기대를 걸지 않았으며 또 일부 창작가들은 《조선은 하나다》의 선률을 가지고 과연 협주곡을 창작해낼수 있겠는가 하고 우려를 표시하였다.

이러한 때 그는 우리 식의 기악음악창작과 관련한 위대한 장군님의 교시들을 빠짐없이 연구하였으며 장군님의 지도를 받아 완성된 기악작품들을 전부 듣고 또 들으면서 사색과 탐구의 밤을 지새웠다.

이 과정에 그는 작품의 구성과 편곡, 선률전개방식에 이르기까지 막혔던 고리들을 하나하나 풀어나갔으며 점차 작품창작에 대한 신심을 가지게 되였다.

그의 비상한 창작적열정과 노력은 끝끝내 열매를 맺어 불과 몇달사이에 작품을 완성하게 되였다.

 이 협주곡의 총보를 본 피아노연주가 민병만은 빨리 형상하여 위대한 장군님께 보고드리자고 재촉하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작품은 합평회에서 완강한 반대에 부딪치게 되였다.

작품을 들은 적지 않은 사람들은 3부분형식으로 되여있는 이 작품의 중간부의 서정적인 선률에 대해 의문을 가지면서 조국통일을 위한 우리 인민의 투쟁을 어떻게 감상적인 선률로 표현할수 있겠는가고 불만을 표시하였으며 일부 일군들도 그 의견에 동조하였다.

예상밖의 결과로 하여 윤충남의 심리적충격은 컸다.

그처럼 고심어린 노력으로 완성된 작품이 빛을 보지 못하고 한순간에 사라져버려야 하는가 하는 절망감으로 하여 그는 맥을 놓고있었다.

바로 이러한 때인 주체64(1975)년 12월말 새해 경축공연종목을 보아주시기 위해 평양대극장에 나오신 위대한 장군님께서 피아노협주곡 《조선은 하나다》를 보아주시였다.

이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 작품에 대한 반영도 들으시고 작품의 중간부에 대하여 의견이 좀 있다고 하지만 내 생각에는 잘 처리된것 같다고, 앞뒤부분과 잘 맞물리게 형상하였다고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그러시면서 피아노협주곡 《조선은 하나다》를 록화하여 텔레비죤방송으로 내보내도록 하고 소리방송으로도 널리 선전하도록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윤충남은 그만 솟구치는 격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눈물을 쏟고야 말았다.

그는 자기 작품이 소생의 빛을 보게 되였다는 기쁨보다도 위대한 장군님의 의도를 관철하는데서 미력하나마 그이께 만족을 드렸다는 행복감으로 하여 어깨를 들먹였던것이다.

그리하여 피아노협주곡 《조선은 하나다》는 1976년 새해 첫 아침에 텔레비죤과 방송으로 온나라에 울려퍼졌다.

그는 작품에서 가요 《조선은 하나다》의 주제사상적내용을 협주곡의 특성에 맞게 훌륭히 형상하였다.

작품전반에서 원곡의 주제사상적내용이 선명하게 안겨오도록 음악구성을 잘하고 생동한 화폭으로 펼쳐보였을뿐아니라 민족적특성과 현대성이 옳게 구현되고 관현악의 다양한 표현수법과 피아노연주의 높은 기교를 발휘할수 있도록 전개하였다.

기백있는 행진곡음악으로부터 시작하여 흐르는 작품에서 그가 특별히 노린것은 중간부음악이다. 그는 원곡의 선률형태를 그대로 살리고 속도를 늦추면서 정서적으로 취급하도록 박자와 형상을 바꾸어 새로운 음악을 도출해냈다. 하여 앞뒤가 잘 맞물리면서도 전혀 새로운 음악형상을 찾아냈던것이다.

이 부분에서 그는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인민들의 뜨거운 흠모의 감정과 통일된 삼천리강산에서 어버이수령님을 높이 모시고 행복하게 살려는 온 민족의 절절한 통일념원을 잘 반영하였다.

이렇듯 우리 식 피아노협주곡의 첫 작품이 태여나 우리 당의 기악음악창작방침의 정당성과 생활력을 힘있게 과시하였다.

이 작품은 나온 순간부터 내외의 깊은 관심속에서 연주되여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우리 나라 교향악단이 1992년에 일본을 방문하였을 때에도 피아노협주곡 《조선은 하나다》를 연주하여 70만재일동포들을 조국통일의 열망으로 가슴끓게 하였으며 광범한 일본인민들에게도 우리 인민의 조국통일의지를 깊이 심어주었다.

또한 작품은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에 참가한 세계 여러 나라의 유명한 피아노연주가들이 우리 민족의 숙원인 조국통일을 련대하는 마음으로 훌륭히 연주하여 깊은 인상을 남겼다.

피아노협주곡 《조선은 하나다》의 창작성과에 이어 그는 창작적열정을 더욱 폭발시켜 전시가요 《결전의 길로》(김옥성 작, 1951년)를 가지고 련이어 피아노협주곡 《결전의 길로》를 창작하여 내놓았다.

그는 피아노협주곡 《결전의 길로》에서 우리 인민군장병들속에서 발휘된 대중적영웅주의와 그들의 숭고한 정신세계를 폭넓게 형상함으로써 우리 인민들을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에 대한 무한한 충실성과 조국수호정신으로 교양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처럼 윤충남은 우리 식의 피아노음악창작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그의 음악적재능을 귀중히 여기여 우리 당에서는 그를 관록있는 예술단체인 피바다가극단의 작곡가로 불러주었다.

희망찬 창작의 나래를 더욱 활짝 펼친 그는 끝없는 창작적열정으로 가슴불태웠다.

그의 창작적재능과 특기는 교향악분야의 편곡에서 더욱 두각을 나타내였다.

국립교향악단의 이전 벌가리아인민공화국방문때 그는 벌가리아의 노래 《오, 발칸이여》를 가지고 관현악을 훌륭히 창작하여 내놓아 그 나라 인민들로부터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때 그들은 자기네 노래가 이처럼 훌륭한줄 몰랐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도 창작에 불타고 개성있던 그는 젊은 나이에 그만 불치의 병을 만나게 되였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비관하지 않았으며 생을 마칠 때까지 창작에 온넋을 바치며 락천적으로 살았다.

병마에 견디기 힘든 육체적고통속에서도 그는 당에 기쁨드릴 오직 한마음을 안고  바이올린협주곡 《조국과 더불어 영생하리라》의 창작구성을 무르익히고 끝내 완성하였다.

뿐만아니라 창작가들과 함께 교향곡 《꽃파는 처녀》창작에도 합세하였다.

병세가 기울어졌을 때에도 그는 병문안을 온 동지들에게 오히려 롱담을 걸며 웃음보를 터쳐놓아 모두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처럼 재능있던 윤충남은 1981년에 36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우리의 곁을 떠났다.

그의 창작생활은 길지 않았지만 그는 생을 값있게 산 당에 충직한 음악가였다.

어버이장군님께서는 훌륭한 피아노음악을 창작한 그의 공로를 헤아리시여 그의 가족에게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아버지의 얼굴조차 모르고 자란 그의 아들은 위대한 장군님과 경애하는 원수님의 은정속에 오늘은 국립교향악단의 작곡가로 아버지의 대를 굳건히 이어가고있다.

그는 비록 우리의 곁을 떠났어도 그가 창작한 피아노협주곡 《조선은 하나다》와 《결전의 길로》를 비롯한 작품들은 이 땅에 끝없이 울리고있다.

짧은 생애에 두편의 명작을 내놓아 생을 빛내인 그의 창작생애는 오늘도 우리들에게 말해주고있다.

당의 참된 문예전사로 값있게 산 예술인들의 삶은 비록 그 생이 짧다 하여도 영원히 빛난다는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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