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문학예술의 계승자, 혁신자〉각지 문예동 맹원들④

〈재일동포문학예술의 계승자, 혁신자〉각지 문예동 맹원들④

【조선신보》2022.07.17

문예동은 일본 방방곡곡에 흩어져있던 문학예술가들이 집결하여 1959넌 6월 7일에 결성된 주체적이며 애국적인 첫 문예조직이다. 이역땅에서도 조국과 민족을 위한 곧바른 한길에서 문학예술을 창조하여온 각지 문예동 맹원들의 열정과 헌신을 한달에 1번 소개해나간다.(협력=문예동중앙)

조선음악을 널리 소개/문예동大阪 음악부 리광석씨

오사까조선취주악단

문예동大阪 음악부 리광석씨는 오사까조선취주악단의 부단장을 맡아한다.

오사까조선취주악단은 1974년에 오사까조고 취주악부 이전 소조원들로 결성되였다. 올해로 창립 48돐을 맞이하게 되니 단원들은 일본에서 가장 력사가 오랜 조선취주악단이라고 긍지 높이 말한다.

창립당시는 10대, 20대 청년들로 구성된것과 관련하여 조청 취주악단으로 활동하다가 그 몇년후에 오사까문예동에 속하게 되였다.

현재는 10대부터 50대까지 남녀로소 단원들 약 30명이 망라되여 조선음악과 세계각국의 취주악곡들을 연주하고있다. 이 활동에 찬동하는 일본인연주가들도 악단에 망라되고있다.

오사까조선취주악단은 해마다 정기연주회를 개최하여 오사까동포들과 일본의 음악애호가들에게 조선음악과 우리 예술을 널리 소개하고있으며 새로 창작된 악곡들을 보급하는 활동도 벌리고있다.

꾸준한 활동의 결실로서 작년 11월 23일에는 제39차 정기연주회를 가졌다.

우리 학교 취주악부를 도와주고 후대들을 키우는 사업도 취주악단의 중요한 활동으로 되고있다. 요청이 있으면 우리 학교 운동회에서도 연주를 피로한다. 공연을 통해 북남조선, 조일사이의 다리적역할을 수행하여왔다.

코로나재앙으로 어려운 환경이 조성되고있으나 리광석씨는 자랑많은 취주악단의 부단장으로서 그 전통을 계승해나갈것을 다짐하고있다.

그는 《우리 악단은 올해 제40차 정기연주회를 가지게 되며 가까운 시기에 창립 50돐을 맞이하게 됩니다. 새세대 단원들을 내세워 민족예술을 널리 알려나가는 보람찬 사명을 훌륭히 다해나가겠습니다.》고 말하였다.

무용, 문예동활동은 생활의 일부/문예동교또 무용부 신미화씨

신미화씨는 생활의 일부가 조선무용이며 문예동의 활동이라고 이야기한다.

문예동교또 무용부 부장인 신미화씨가 조선무용과 만난것은 초급부 4학년시절이였다. 그때로부터 30여년이 지났다.

《언니들이 춤추는 모습이 너무 눈부시고 내 가슴이 뿌듯해졌다. 조선학교에 편입한 나에게 있어서 우리 무용을 춤추는것은 발씨가 서투른 일이였지만 모든것이 신선하여 어느새 무용훈련실이 나의 보금자리로 되였었다.》고 그는 돌이켜본다.

우아한 민족의상을 차려입고 재치있는 장단가락에 맞춰 춤추던 그 설레이는 기쁨, 이를 온 몸으로 느낀 학생시절의 첫 무대를 그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있다.

초급부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학생시절을 무용과 함께 보내면서 저도모르게 장단가락이 자기 몸에 스며들어 무용선생님이 되고싶다는 꿈을 가지게 되였다.

모교의 교단에 서면서 학생들에게 무용을 더잘 지도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더 경험을 쌓아야 한다고 문예동 조청조 무용부에 소속하여 밤훈련도 거듭하였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였다. 빈틈없이 교수준비를 하여 학생들을 위한 수업을 진행하다가 녹초가 되여도 자기 몸을 채찍질하여 련습장으로 향하였다.

대규모무용공연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일본각지의 많은 동포들은 민족문화의 귀중한 재보의 하나인 조선무용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률동에 매혹되여 우렁찬 박수갈채를 보내였다.

그는 《일본땅 방방곡곡을 돌아 많은 무용수들과 교류를 깊여 또 유명한 작품들을 춤출수 있어 참으로 행복한 나날이였다.》고 말하였다.

어머니가 되여 교단을 떠난 후에도 문예동교또 무용부 부장을 맡고 녀성동맹책임자도 오랜 기간 맡았다. 생활의 일부가 조선무용이며 문예동의 활동이였다.

어렵고 힘들어도 왜 그렇게도 정을 쏟아 련습장에 발을 옮길수 있었는가-그 물음에 조선무용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정열의 꽃은 시들줄 모른다는것, 동포들을 애족애국의 한길로 고무추동하는 문예동교또의 한사람으로서 여러 예술분야에서 활약한 스승, 동지들과 함께 키잡아 활동할수 있는것이 더없이 기쁘고 마음의 기둥으로 되고있기 때문이라고 그는 대답하였다. 그리고 민족의 넋이 깃든 조선무용을 꿋꿋이 이어 교또동포사회를 민족예술로 활성화하기 위해 발벗고 나설것이라고 덧붙였다.

일본에서 나서 자란 미더운 우리 학생들에게 민족예술전통을 전하고 풍부한 정서와 민족적자부심을 안겨주고싶다는 일념으로 그는 다시 교단에 서게 되였다.

그는 《우리 학교에서, 우리 재일동포사회에서 보답의 자욱을 새기고싶다. 아이들의 창창한 미래를 위하여 민족의 예술, 조선무용의 발전을 위하여 분발하고 또 분발하겠다. 나는 우리 무용을 사랑한다. 나의 무용인생은 아직도 계속된다.》고 힘주어 말하였다.

꿈을 꽃피워나가는 어머니와 딸/문예동히로시마 리미지씨와 리애리씨

문예동히로시마지부 성악부의 리미지씨와 기악부 리애리씨는 어머니와 딸이다.

문예동히로시마 리미지씨(왼쪽)와 리애리씨

히로시마조고 취주악부에 소속하여 삭스(サックス)연주자로, 가무단에 입단해서는 명가수로 동포들의 사랑을 받은 리미지씨는 결혼을 계기로 가무단을 퇴단하다가 3년후 문예동히로시마지부의 결성을 계기로 다시 예술의 길을 걷게 되였다.

그는 《역시 우리 노래가, 우리 음악이 제일이다. 집안 일, 직장 일,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도 노래가 없는 자신의 인생을 상상못한다.》고 한다.

큰딸은 커서 취주악부, 둘째딸은 무용부에 속하여 예술활동을 벌렸다. 아이들의 활약을 곁에서 보는것만해도 어머니는 큰 행복을 느끼군하였다. 아이들의 모습이 가수로 활동하는 원동력으로도 되였다.

얼마전부터 큰딸 리애리씨가 문예동 기악부에 소속하게 되였다. 리지미씨의 립장에서는 딸과 같이 활동을 하게 된다니 불안이 앞서서 심정이 복잡하였다고 토로한다. 딸 리애리씨는 음악대학을 졸업하여 색소폰 연주가의 길을 걸어가고있었다. 일본사람속에서 활동하는 딸이 문예동사업을 해나갈수 있을가고 걱정도 하였다.

그런데 새로운 성원들로 새출발을 하게 된 기악부가 공연의 성공을 위하여 분투하는 모습을 보았다.

리애리씨는 코로나재앙속에서도 온라인을 활용하여 선배들과 연주에 대해 토론하고 후배들의 지도도 진행하였다. 그리고 전문가로서 자기의 기량을 높여나갔다. 무대를 함께 만들어나가는 문예동활동을 통해서만 볼수 있는 모습이였다.

문예동히로시마의 맹원들은 어머니와 딸이 민족예술을 사랑하고 자기의 꿈을 꽃피워나가는 모습에서 대를 이어 우리 예술을 고수발전시켜나가는 문예동활동의 생활력을 보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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