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봉/영생하는 명배우

영생하는 명배우

주체112(2023)년 5월 2일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오랜 기간 혁명을 해오시면서 그가 누구든 일단 동지적관계를 맺으시면 그의 운명과 미래를 끝까지 책임지고 보호해주시였으며 수천수만의 혁명전사들을 한품에 안아 크나큰 믿음을 주시고 온갖 사랑을 다 베풀어주시였다.》

사람들속에 지울수 없는 인상을 남긴 우리 나라 영화예술인들속에는 문예봉선생도 있다.

주체6(1917)년 1월 함흥에서 태여나 제사공으로, 남의 집 아이보개로 떠돌다가 서울의 어느한 연극단에 들어갔던 그는 라윤구의 도움으로 16살에 영화배우가 되였다.

그는 그때로부터 《임자없는 나루배》, 《춘향전》, 《나그네》 등 여러편의 영화들에 출연하여 《은막의 녀왕》으로까지 불리웠으나 식민지예술인의 기구한 운명에서 벗어날수 없었다.

나라를 일제에게 통채로 빼앗기고 하루하루 연명하기조차 힘겨웠던 민족수난의 그 세월 그는 그처럼 바라던 영화배우를 그만두지 않으면 안되였다.

영화배우를 일생의 천직으로 여기며 살아온 그에게 있어서 배우생활을 그만둔다는것은 생을 포기하는것과 다름이 없었다.

며칠후 《조선일보》를 비롯한 여러 신문들에는 문예봉이 영화계에서 은퇴했다는 기사가 일제히 실리였다.

해방후 공화국의 품에 안겨서야 문예봉선생은 자신이 그처럼 희망하고 바라던 영화배우생활을 다시 찾을수 있었다.

주체37(1948)년 8월 22일, 그날은 문예봉선생에게 있어서 일생을 두고 잊지 못할 운명전환의 날이였다.

그토록 뵈옵고싶던 위대한 김일성동지를 만나뵙는 영광을 지니게 되였던것이다.

문예봉선생을 만나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어쩔바를 모르고 감격에 목메여하는 그에게 아이들은 몇이나 되는가, 학교에는 다 다니는가고 친어버이심정으로 하나하나 물어주시였다.

문예봉선생은 그토록 인자하신 어버이수령님앞에서 어느덧 어려움도 다 잊어버리고 친정집에 찾아간 딸자식마냥 아이들은 모두 학교에 다니고 수령님께서 다녀가신 집에서 아무런 불편이 없이 행복하게 생활하고있다고 말씀드렸다.

그의 대답을 들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러면 마음이 놓인다고 하시면서 애로되는것이 있으면 어려워말고 다 제기하라고 하시였다.

진정 어버이수령님은 문예봉선생에게 있어서 삶과 행복까지도 다 찾아주신 생의 은인이시였다.

문예봉선생은 그날 수령님을 만나뵈온 영광과 끝없는 감격을 가슴깊이 간직하고 그이의 크나큰 신임과 배려에 꼭 보답하리라 굳게 속다짐하였다.

그는 진정한 민족문화를 건설할데 대한 어버이수령님의 숭고한 뜻을 받들어 영화창조사업에 자기의 지혜와 정열을 다 바치였다.

하기에 그는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든 예술영화 《내 고향》의 녀주인공역을 진실하게 형상하여 또다시 어버이수령님의 값높은 치하를 받는 영광을 지니였다.

그 이후에도 그는 《빨찌산처녀》, 《성장의 길에서》, 《광주는 부른다》 등 수십편의 영화들에서 참신하고 소박한 역형상으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였다.

그 과정에 그는 어버이수령님의 존함이 모셔진 시계표창을 비롯한 높은 국가수훈의 영예를 지니게 되였으며 1952년에 공훈배우칭호를, 1982년에 인민배우칭호를 수여받았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친히 그의 연기형상방도에 이르기까지 세심히 가르쳐주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여든번째 생일을 맞이한 그에게 은정어린 생일상과 언제나 젊음에 넘쳐있으라고 사랑의 보약까지 보내주시였다.

진정 나이 80에 이르기까지 그가 영화들에 출연하여 명배우로 인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올수 있은것은 전적으로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사랑과 세심한 지도를 떠나 생각할수 없다.

그는 절세위인들의 하늘같은 사랑과 은덕을 길이 전해가기 위해 《영화와 함께 70년》이라는 책을 집필하다가 1999년 3월 82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주체영화예술발전에 공헌한 예술가의 삶을 값높이 내세워주시고 그의 유해를 애국렬사릉에 안치하도록 해주시는 크나큰 은정을 돌려주시였다.

절세위인들의 품속에서 영화와 함께 한생을 값있게 살아온 문예봉선생의 생은 오늘도 조국의 기억속에 영생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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