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작곡가가 받아안은 두대의 피아노

《우리 민족끼리》주체112(2023)년 7월 5일

한 작곡가가 받아안은 두대의 피아노

우리 공화국의 작곡가들중에는 해방후 새 조선건설의 어려운 시기에 위대한 수령님으로부터 피아노를 선물로 받아안았고 70돐생일날에는 위대한 장군님으로부터 피아노를 선물로 받아안은 복받은 작곡가가 있다.

그가 바로 리면상(1908년 4월 8일-1989년 6월 25일)선생이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노래 <눈이 내린다>의 작곡을 리면상선생이 하였습니다. 리면상선생은 인민들의 사랑을 받는 수많은 음악작품들을 창작하였습니다. 나는 리면상선생을 존경합니다.》

희세의 걸출한 음악거장이신 위대한 장군님의 추억속에 20세기 음악명인으로 영생하는 리면상선생.

한 작곡가에게 베풀어주신 절세위인들의 크나큰 사랑과 믿음은 그로 하여금 인민이 사랑하는 수많은 명곡들을 창작할수 있게 한 원동력으로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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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강산에 봄빛이 무르녹던 해방된 이듬해 5월 어느날 평양에서는 북조선 각 도인민위원회, 정당, 사회단체 선전원, 문화인, 예술인대회가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성대히 열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만면에 환한 미소를 지으시고 나오시자 우렁찬 박수와 《만세!》의 환호가 대회장을 진감하였다.

절세의 애국자, 항일의 전설적영웅을 맞이하여 열광의 파도가 굽이치는 장내에는 함흥에서 불원천리 달려온 30대의 리면상선생도 있었다. 대회에서 그는 위대한 수령님의 뜻깊은 연설을 직접 받아안게 되였다.

대회가 끝난 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각 도대표들과 함께 함경남도음악건설동맹 위원장이였던 리면상선생을 친히 불러주시였다.

삼도왜적이 벌벌 떨던 백두산장군을 이처럼 몸가까이 뵈옵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던 리면상선생은 너무도 분에 넘친 영광에 몸둘바를 몰라하였다.

리면상선생의 두손을 뜨겁게 잡아주시고 건강부터 다정히 물으시며 북조선의 문화인들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였는데 그동안 사업에서 애로되는 점들이 있으면 기탄없이 제기하라고 말씀하시는 그이의 소탈하신 풍모는 작곡가를 끝없는 매혹의 세계에로 이끌어갔다.

한가슴에 온 겨레를 품어안으시고 항일의 혈전만리를 헤치시는 나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신민요창작으로 일제통치에 항거하여나섰던 청년음악가의 이름을 잊지 않고계시였다.

그이께서는 건국열에 불타는 리면상선생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근로대중은 예술의 향유자일뿐 아니라 예술의 창조자입니다.》

인민들속에 시도 있고 노래도 있고 참다운 예술이 있으며 우리의 음악이 철두철미 인민을 위해 복무하여야 한다는 철리를 리면상선생은 피끓는 심장속에 새기고 또 새기였다. 해방을 맞은 기쁨에 넘쳐 서둘러 창작의 붓을 들었건만 갈피를 못잡고있던 작곡가에게는 새 조선의 음악이 나아갈 길이 안개걷힌 지평선마냥 뚜렷이 안겨왔다.

처량한 민요가락만이 울리였던 작곡가의 창작적사색속에서는 우리 인민의 혁명적지향과 감정정서가 맥박치는 선률들이 하나의 완결된 음악형상으로 새롭게 무르익어갔다.

백두산장군을 만나뵈온 해에 《소년단행진곡》과 《산업건국의 노래》를 작곡한 리면상선생은 《빛나는 조국》, 《승리의 5월》, 《산으로 바다로 가자》 등 훌륭한 가요들을 련이어 세상에 내놓았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리면상선생의 남다른 재능과 애국적열의를 귀중히 여기시여 그에게 조선음악가동맹 위원장의 중임을 맡겨주시고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으로 내세워주시였다. 그이께서는 리면상동무가 작곡한 노래들은 민족적이며 인민적인 정서가 풍부한것으로 하여 인민들의 환영을 받고있다고 높이 평가하시며 새 조선건설의 어려운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작곡가에게 피아노까지 선물로 보내주시였다.

감격이 극하면 말문이 막히는 법이다. 윤기도는 피아노를 어루쓸던 날 리면상선생은 형언할수 없는 감동이 북받쳐올라 눈굽이 축축히 젖어드는것을 억제할길 없었다. 한많던 세월의 응어리가 뿌리채 뽑혀지는것만 같았다.

함흥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여나 어릴적부터 음악에 뜻을 품었던 그는 20대에 일본으로 건너가 고학도 해보았다.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신문배달, 우유배달 등 무슨 일인들 못해보았으랴. 짬짬이 작곡한 노래를 피아노에 태워보고싶었건만 식민지청년의 궁핍한 처지에서는 엄두도 못낼 일이였다. 무거운 마음으로 피아노련습실을 지나쳐야 했던 그는 어느날 용기를 내여 사용료를 꼭 물겠다는 글쪽지를 남겨놓고 피아노앞에 앉았다가 류치장신세를 지고 퇴학까지 당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

한 작곡가의 이런 피눈물나는 가슴속사연까지 헤아리시여 창작의 나래를 활짝 펼쳐주시는 어버이수령님의 사랑은 리면상선생을 지칠줄 모르는 음악창작의 길에 굳건히 세워주었다. 사연깊은 그 피아노의 울림속에서 가렬한 전화의 나날 우리 인민들과 인민군장병들에게 커다란 힘과 용기를 안겨준 《조국보위의 노래》, 《문경고개》와 같은 명곡선률들이 나래칠수 있었고 불타는 고지와 싸우는 후방에서 병사들과 인민들과 고락을 같이하며 《내 고향의 정든 집》, 《압록강 2천리》와 같은 전시가요들도 창작될수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해방직후부터 40여년간을 시대의 가수로서 활약한 리면상선생에게 조선의 명가요를 거의다 창작한 작곡가, 자신께서 제일 아끼고 사랑하는 작곡가라는 최상최대의 칭호를 안겨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세상을 놀래우는 주체조선의 20세기 문예부흥기를 창조하시던 그 나날 60나이를 넘긴 작곡가를 음악창작의 보람넘친 길로 줄기차게 떠밀어주시였다.

천출음악위인이신 위대한 장군님을 걸음걸음 따랐기에 리면상선생은 5대혁명가극창조사업에서 관록있는 음악로장의 실력을 남김없이 발휘할수 있었다.

리면상선생이 평시에 늘 어버이수령님께서 자신을 참다운 음악창작의 길에 세워주신 은인이시라면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음악창작의 묘술과 방법론을 깨우치시며 음악세계의 정수리로 이끄시는 위대한 스승이시라고 진정을 터친것은 이런 산 체험을 통한 심장의 고백이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생일 70돐을 맞는 작곡가에게 생일상을 잘 차려주도록 각별한 조치를 취해주시고 어버이수령님께서 피아노를 선물로 주시였던 수십년전 일까지 회억하시며 작곡가에게 새 피아노를 보내주시였다.

뜻깊은 생일상과 피아노를 받아안던 그날 작곡가의 두볼로 하염없이 흐르던 뜨거운 눈물은 은혜로운 품에 안아 생을 꽃피워주신 절세위인들에 대한 다함없는 고마움이 넘친 진정이였고 음악창작의 길에 심장의 마지막박동까지 바치려는 굳은 맹세의 분출이였다.

리면상선생이 세상을 떠난지 30여년이 넘었지만 절세위인들의 품속에서 온갖 사랑과 믿음을 받으며 누려온 그의 값높은 삶은 위대한 태양의 사랑을 길이 전하며 우리 인민이 사랑하고 즐겨부르는 수많은 명곡들과 함께 영생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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