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소설】한 여름의 깨달음/김추향

《조선신보》2024년 02월 23일

한 여름의 깨달음/김추향


매미의 소리는 찌는듯한 무더위를 더하고 무용련습을 끝낸 학생들의 걸음을 무겁게 한다. 그러나 선희의 걸음만은 가벼웠다.

선희네 집에서는 한달에 한번씩 가족 세명이 모여앉아 식사를 하는 날이 있다. 오늘은 그날이였다. 지부위원장을 하는 아버지와 밤늦도록 일하는 어머니, 매일 무용소조를 하는 선희가 다같이 모여서 저녁을 먹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니였다. 그래서 선희의 걸음은 피곤을 모르게 집으로 뛰여갔다.

시계는 7시를 가리킨다. 아버지는 돌아올것 같지 않았다. 몇번 휴대전화로 찾아봤지만 련락도 닿지 않았다. 아버지를 기다리다가 지칠대로 지친 선희는 그만 자버렸다.

《선희야, 많이 늦었어! 미안해!》

10시를 넘어서야 들려온 아버지의 목소리로 선희는 잠에서 깨여났다. 선희의 마음에는 아버지가 돌아온 기쁨보다 가족과의 약속을 어긴 아버지에 대한 노여움이 컸다.

《아버지! 왜 일찍 돌아오지 못했어요?》

《안됐어. 갑자기 동포집에 가게 돼서 그래.》

아버지는 미안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버지는 오늘도 《동포》라 하는구나. 동포는 가족보다 중요하다는걸가…)

선희는 불만스러운 감정을 억누르고 자신을 납득시키려고 했다. 선희의 마음을 조금도 모르는 아버지는 《조선신보》를 펼치며 자랑스럽게 말하였다.

《선희, 공연에 나갔다지? 신보에 네가 춤추는 모습이 실렸어. 가장 곱구나.》

선희의 두눈은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가셔진듯 반짝거렸다.

《아버지, 고마워요! 아버지도 한번 보러 오세요! 다음주 토요일에 교내무용발표회가 있는데 어때요?》

《토요일은 사업이 있구나. 지부에서 동포행사가… 선희야, 열심히 련습해.》

《또 〈사업〉이라니…》

아버지입에서 《사업》이라는 말이 나오자 선희는 불만스러운 감정을 더는 억누르지 못해 그만 터쳐버렸다.

《아버지! 아버지는 만날천날 동포요, 사업이요 하지요. 그렇게 좋아요? 자기 딸보다? 아버지가 동포를 우선하는바람에 우리 가족은 셋뿐인데도 한자리에 모여앉질 못해요.》

《그건 그렇지… 하지만 선희도 이제야 고급부생인데 아버지마음을 알아주겠지?》

《몰라요! 난 가족과 함께 지내고싶은것뿐인데… 아버지때문에 우리 가족은 가족사진도 없어요. 동무들은 입학식이나 졸업식날엔 가족사진을 찍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학교에 못 오니 우린 사진 한장 찍지 못했어요!》

《그건 아버지도 제○초급학교행사에 가야 되니…》

《그래요! 아버지가 거주지역 아닌 지역에서 지부위원장을 해서요.》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있던 어머니가 선희를 깨우치려는듯 입을 열었다.

《선희야, 아버지가 왜 그렇게 일하시는지 몰라?》

어머니의 말은 선희를 더욱 괴롭혔다. 선희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심정을 어디에 털어놓으면 좋은지 몰랐다. 심지어는 아버지가 정이 없는 사람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이러다 선희가 아버지를 피하게 된지 3일이 지났다. 선희는 소조가 끝난 후에 지부사무소에서 하기학교에서 쓸 《우리 말 학습》자료를 준비하고있었다. 일본학교를 다니는 우리 소학생들이 처음으로 우리 이름을 쓰고 우리 말을 쓰는 모습을 떠올리니 선희는 피곤을 느끼지 않았다.

《… 예, 그렇습니다. 뜻밖의 일이 있어서…》

옆방에서 들려온 소리에 선희는 귀를 기울였다.

《…그럼 ○○지부위원장이 여기가 거주지부여서 퇴근길에 우리 집에 들려주셨군요. 그래서 일이 겨우 풀렸습니다. …》

선희는 자기 아버지의 이야기를 한다고 단번에 알았다. 그 동포는 지부위원장이 출장을 나가는 동안에 지역동포행사에 대해 알아봐야 할것이 생겨 전임일군을 만나고싶어했다. 지부사무소에 몇번 전화를 걸었으나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은 총련본부에까지 련락을 띄우게 되였는데 좀 떨어진 지역에서 지부위원장을 하는 선희의 아버지가 그 동포를 만나러 집에 왔다는것, 오랜만에 만난다면서 집안의 이야기도 들어주고 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는데도 계속 이야기를 들어주었다는것을 그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것이였다.

선희는 그 이야기를 듣고서 동포들을 마주보는 아버지모습을 그려보았다. 아버지가 흘린 땀만큼, 아버지가 기울인 정성만큼 기뻐하는 동포들과 그 웃음으로 더더욱 만족스러워하는 아버지. 아버지가 동포를 제일로 여기는 까닭을 좀 아는듯 했다.

집에 도착하자 선희는 아버지, 어머니에게 흥분된 어조로 쉬임없이 이야기하였다.

지부사무소에서 하기학교준비를 했다는것, 소조후인데도 하기학교에 참가하는 아이들의 얼굴을 그려보니 힘들지 않았다는것… 아버지는 선희의 이야기를 듣고서 아버지도 동포들과 접하니 시간 가는줄 모른다고, 그만큼 동포들에게서 우리는 많은것을 배운다고 하였다.

《그러니 아버지는 동포들을 위해 동포들과 평생 함께 살아나가는거야.》

(그러셨구나, 동포들덕분에 우리 아버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신거구나!)

(조선대학교 문학력사학부 어문학과 3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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