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린연주가 백고산

주체106(2017)년 4월 19일

바이올린연주가 백고산

인민배우 백고산은 바이올린과 함께 한생을 살아오며 뛰여난 연주기술과 후비육성으로 조국과 민족의 영예를 떨치는데 크게 기여한 재능있는 바이올린연주가이며 교육자이다.

백고산은 1930년 5월 27일 평양시 서성리(당시)에서 태여나 3살때부터 바이올린애호가였던 아버지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우며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자식들의 소질이나 장래발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험난한 세월을 살아가자면 무엇이든 생존수단으로 삼을만한것을 익혀줘야 한다는데로부터 어린 세 아들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시작하게 된 동기는 어찌되였든 백고산에게는 천성적인 음악적재능이 있었다. 그는 바이올린을 잡은지 얼마 안되여 민요가락이나 동요들을 어렵지 않게 그어갔고 6살때부터는 거리와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연주하여 가정의 생계를 이어가는데 보탬을 주었다.

8살나던 1938년에 그는 좋은 음악학교에서 공부시켜주겠다는 한 일본인 흥행업자의 얼림수에 속히워 일본땅으로 가게 되였다.

흥행업자는 음악학교가 아니라 어린 나이에 쉽지 않은 연주재능을 가진 그를 야외무대들에 끌고 다니며 돈벌이수단으로 삼았다. 나라잃고 돈없는 탓에 남의 나라에서 남이 즐기는 음악들을 연주하지 않으면 안되였지만 진창속에서도 빛을 잃지않는 진주처럼 어린 백고산은 조선의 천재적인 소년바이올린수로 일본땅에 널리 소문이 나게되였다.

10살잡히던 1940년에 조선에 돌아온 백고산은 6살난 동생(백도산)과 함께 흥행업자들이 이끄는대로 온 나라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순회연주생활을 하였다.

이렇게 발가는대로 방랑연주생활을 하던 그들 형제는 1943년에 압록강을 건너 중국 할빈에 이르게 되였다.

할빈에서 백고산은 로씨야인 음악가부부(남편은 바이올린연주가로서 후날 옴스크음악대학 학장을 함. 안해는 피아노연주가임)를 만나게 되였으며 그들의 방조로 당시 할빈에서 제일 큰 극장이였던 모델극장에서 공연할수있게 되였다.

백고산형제의 그날의 공연은 관객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공연을 본 조선동포들은 민족적수난속에서도 쉽지 않은 재능을 익힌것이 너무도 기특하여 그들 형제를 얼싸안고 기뻐했으며 옷조차 변변치 못한것이 가슴아파 그들에게 새 옷을 지어입히는 이름모를 동포도 있었다.

이런속에서 백고산의 마음속엔 기량을 더욱 련마하여 바이올린으로 민족의 재능을 떨쳐보려는 굳은 결심이 자리잡게되였다. 그래서 그는 9살난 동생을 홀로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로씨야인 음악가에게서 개별지도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과 함께 조국이 해방된 소식에 접한 백고산의 마음은 조국으로, 고향 평양으로 나래쳐갔다.

그러나 일제의 패망에 이어 국내전쟁의 불길에 휩싸인 동북지방의 엄혹한 정세로 하여 그는 귀국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중국혁명을 지원할데 대한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방침을 높이 받들고 당시 16살의 애젊은 청년이였던 백고산은 선전대 대장으로 동북해방전투에 참가하였다.

그는 중국의 국내혁명전쟁이 승리적으로 결속되여가던 1949년 5월 그리운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은혜로운 어머니조국은 나라없던 그 세월 어린 몸으로 전 조선땅은 물론 일본과 만주를 방랑하며 인생길을 파란곡절과 피눈물속에 헤쳐온 그를 사랑의 넓은 품에 따뜻이 품어주었다.

백고산의 눈물겨운 류랑연주에 대하여 잘 알고계시던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조국에 귀국한 백고산을 갓 조직된 조선인민군협주단 관현악단 악장으로, 독주가로 내세워주시여 보람찬 음악활동을 마음껏 할수있는 넓은 길을 열어주시였다.

해방후 다섯번째 설을 맞는 주체39(1950)년 정월 초하루날 위대한 주석님께서 조선인민군협주단의 지휘성원들과 함께 백고산을 부르시여 몸소 그의 바이올린연주를 들어주시고 연주활동에서 지침으로 되는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그가 연주하는 외국곡과 민요 《양산도》를 들으신 그이께서는 바이올린을 잘 탄다고, 발전성이 있다고 높이 평가해주시면서 음악연주에서 다른 나라의것을 하는것도 좋지만 우리 나라의것을 많이 연주해야 한다는 뜻깊은 교시를 주시였다.

그때부터 한달이 지난 2월 어느날 그이께서는 또다시 조선인민군협주단의 공연을 보아주시면서 백고산이 확실히 바이올린을 잘 연주한다고 치하하시며 앞으로 그를 더 공부시켜 훌륭한 연주가로 키워야하겠다고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그리고 그를 국내무대는 물론 외국공연무대들에도 많이 내세워 연주실천속에서 기량을 높여나가도록 세심한 배려를 돌려주시였다.

위대한 주석님의 사랑과 믿음으로 백고산은 주체39(1950)년 6월 첫 외국공연의 길에 올랐다.

모스크바에서 공연활동을 하던 중 조국이 전쟁의 불길에 휩싸인 소식에 접한 백고산은 침략자들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을 안고 예술인들과 함께 조국으로 달려나왔다. 그는 조선인민군협주단 소편대에 망라되여 불타는 전호와 승리한 고지들에서 인민군용사들을 고무하는 전선위문공연활동을 정열적으로 벌렸다.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서는 전선형편이 그처럼 어려운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주체40(1951)년 8월 베를린에서 진행된 제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는 예술단에 백고산을 포함시키도록 배려를 돌려주시였을뿐아니라 예술단이 귀국할 때 그가 모스크바에 남아 음악대학 특별연구생으로 공부하도록 은정깊은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위대한 주석님의 하늘같은 은덕과 조국의 고마움에 보답하기 위하여 백고산은 연습실에서 밤낮을 잊어가며 훈련하고 또 훈련하였다.

1954년에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백고산은 국립교향악단 바이올린독주가로 활동하였다.

그는 극장무대에서만이 아니라 전후복구건설과 사회주의건설로 들끓는 공장과 농촌, 건설장들마다에서 공연활동을 하였으며 바이올린독주곡 《고향길》(김길학 작곡)을 비롯하여 바이올린협주곡 《굴진공》(박민혁 작곡), 《용광로가 보이는 바다가에서》(김린욱 작곡) 등 많은 독주곡들의 첫 연주를 하였다.

백고산은 제4차 세계청년학생축전(1953년)과 제5차 세계청년학생축전(1955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차 챠이꼽스끼명칭 국제음악콩클(1957년) 에 참가하여 훌륭한 성과를 이룩함으로써 조국의 영예를 크게 떨쳤다.

1960년대에 이르러 백고산은 서양악기를 조선음악에 복종시킬데 대한 위대한 주석님의 가르치심을 명심하고 《아리랑》,《돈돌라리》를 비롯하여 인민들이 사랑하는 민요들을 많이 연주하였다.

주체51(1962)년초 어느 한 종합공연무대에서 백고산이 연주하는 바이올린독주곡 《아리랑》을 들으신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보라, 서양악기인 바이올린을 가지고도 우리 민요를 연주하니 얼마나 좋은가고 못내 만족해하시며 연주활동에서 주체를 튼튼히 세울데 대한 강령적인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위대한 주석님께서 아끼고 내세우시여 관록있는 연주가로 키워오신 백고산이 한생을 바이올린과 함께 값높은 삶을 빛내가도록 온갖 사랑과 배려를 다 돌려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주체60(1971)년 6월 주체적배합관현악을 창조하시던 력사적시기에 백고산을 영화음악단(당시)의 관현악단 악장으로 내세워주시였을뿐아니라 만수대예술단에 품위있는 녀성기악중주조를 꾸리실 때에도 그를 기술지도원으로 불러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다심하신 사랑과 믿음속에 백고산은 환갑이 훨씬 지나도록 손에서 바이올린을 놓지 않고 평양음악무용대학(당시) 기악학부장, 특설학부 바이올린교수로 활약하면서 재능있는 독주가후비들을 육성하는데 정력을 바쳤다.

그는 실기교육을 하면서도 바이올린음악창작에 힘을 기울여 불후의 고전적명작 《조국의 품》《축복의 노래》를 편곡한 바이올린독주곡들을 비롯하여 《대를 이어 충성을 다하렵니다》, 《결전의 길로》,《닐리리》 등 수십여편의 바이올린독주곡, 협주곡들과 연주교재들을 창작하여 교육과 연주실천에 도입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백고산의 높은 연주실력과 교육활동에 커다란 만족을 표시하시며 그를 자주 몸가까이 불러 육친적인 사랑을 부어주시고 세계적으로 흔치 않은 수제품바이올린을 선물로 안겨주시였다.

백고산은 위대한 장군님의 은정깊은 사랑과 믿음에 보답하기 위하여 열과 정을 다하여 교육사업에 헌신하다가 1997년 11월 26일 강의도중에 급병으로 순직하였다.

현지지도의 길에서 인민배우 백고산의 사망에 대한 소식을 보고받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애석함을 금치못해하시며 백고산동무는 어려서 부모곁을 떠나 류랑하면서 고생도 많이 하였다고, 그는 조선로동당의 품에 안겨서야 참된 삶을 찾았고 재능도 꽃피웠다고 뜨겁게 추억하시였다. 그리고 그의 장례와 부고를 내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가르치심을 주시였으며 그의 시신을 신미리애국렬사릉에 안치하도록 뜨거운 배려를 베풀어주시였다.

민족수난의 그 세월 모진 가난으로 하여 바이올린과 기구한 인연을 맺게 되였고 그 바이올린으로 하여 파란만장의 길을 걷지않으면 안되였던 백고산. 정녕 그는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과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은혜로운 품에 안겨서야 비로소 인간의 존엄과 예술가의 긍지, 참다운 행복을 누릴수있었으며 조국과 인민의 추억속에 오늘도 영생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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