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음악가의 삶을 꽃피워준 품한 후보원사의 수기집을 펼치고

민족음악가의 삶을 꽃피워준 품한 후보원사의 수기집을 펼치고

《로동신문》주체111(2022)년 11월 3일

우리는 한권의 부피두터운 책을 마주하고있다.

김원균명칭 평양음악대학 주체음악연구소 실장 후보원사이며 교수, 박사인 박형섭선생의 수기집이다.

올해 그의 나이는 83살, 짧지 않은 한생이 글줄마다, 페지마다에 뜨겁게 어려있는 수기집은 민족음악과 더불어 흘러온 한 인간의 추억과 체험담인 동시에 인민의 재능을 활짝 꽃피워주는 은혜로운 어머니품이며 참된 삶을 누리는 행복의 요람인 사회주의조국에 대한 찬가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나라 사회주의제도는 세상에서 가장 우월한 사회제도입니다.》

그의 수기집의 첫페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나는 해방전 강원도 천내군의 어느한 빈농가정에서 8남매의 다섯째로 태여났다.대대로 빈농의 가정이다보니 가문에는 학교를 다녀본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그런 집안에서 태여난 나도 아마 우리 수령님께서 나라를 찾아주시지 않았더라면 빈농의 자식으로, 머슴군으로 한생을 눈물속에 살아야 했을것이다.》

어려서부터 그는 음악신동으로 마을에 소문이 났었다고 한다.아버지는 그에게 생일선물로 참대를 깎아서 단소를 만들어주었다.그것으로 그는 민요 《아리랑》의 곡조를 불군 했다.그러면 어느새 다가온 마을사람들은 그 곡조에 불우한 자기들의 인생을 실어보며 울었다.구슬프게 울려가는 단소소리와 함께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는가고 하는 울부짖음도 흘러나왔다.그러던 어느날 왜놈들이 달려들어 그의 가냘픈 손에서 단소를 앗아내여 더러운 게다짝으로 짓밟았다.그후부터 다시는 그의 집에서 《아리랑》의 곡조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안겨주신 새삶의 빛발은 그에게 노래를 다시 안겨주었다.그의 부모가 제일 좋아한것은 자식들이 나라의 은덕으로 공부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 학교에서 배운 노래를 서로 경쟁적으로 부르는것이였다.특히 다시 단소를 들고나선 그를 보며 어머니는 눈물을 머금고 이렇게 외우군 했다고 한다.

《너는 꼭 옥토에 배긴 씨알같구나.》

어머니의 소박한 말은 그로 하여금 지혜와 재능을 키워주는 조국의 고마움을 느끼게 하였으며 한생을 조국에 보탬을 주는 음악가로 살려는 각오를 다지게 하였다.

나라에서는 그를 희망대로 평양음악대학 민족음악학부(당시)에서 공부시켜주었으며 졸업후에는 교단에 세워주었다.

그무렵 그는 어버이수령님께서 음악대학의 민족음악학부를 강화하고 민요와 민족악기를 전공하는 학생들을 더 많이 길러야 한다고, 이리하여 우리의 민족음악을 현대화하며 우리 시대에 맞게 더욱 발전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고 교시하시였다는 소식에 접하게 되였다.

(내 한생 민족음악을 발전시키는 길에 하나의 디딤돌이 되리라.)

그는 새세대 민족음악가후비들을 키워내는 사업에 자기의 열정을 다 바쳤다.

교원생활을 한지 불과 몇해사이에 두명의 제자가 어버이수령님께 단소독주를 보여드려 기쁨을 드렸다는 사실은 그가 민족음악가후비를 키우기 위해 어떻게 노력했는가를 잘 말해주고있었다.

수기의 갈피에는 이런 사실도 씌여져있었다.

《지금까지 3명의 박사, 30여명의 석사 양성.》

단 한줄이였다.하지만 여기에는 그가 걸어온 량심의 길, 보답의 길이 뚜렷이 새겨져있었다.도서 《조선민족악기》를 집필하여 위대한 장군님의 지도밑에 이룩된 민족악기들의 개량완성성과를 고증하고 후세에 남긴것도, 여러 국제학술토론회에 참가하여 우리 민족음악의 우수성을 빛내인 이야기도 그길에 다 수놓아져있었다.

경애하는 총비서동지께서는 한 민족음악가가 이룩한 공적을 높이 내세워주시며 후보원사의 값높은 영예도 지니도록 해주시였고 80번째 생일을 맞을 때에는 사랑어린 생일상도 보내주시는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그때 그는 생각하였다.영광과 행복이라는 말이면, 아니 세상의 그 어떤 어휘와 표현이면 자신의 심정을 그대로 옮길수 있을것인가.

하여 그는 오래간만에 단소를 들었다.그리고 민요 《아리랑》을 연주했다.나라없던 그 세월 인생의 초년기에 그가 연주한 《아리랑》의 곡조에 울분과 한탄이 실려있었다면 인생의 황혼기에 연주하는 단소소리에는 기쁨과 행복이 가득 어려있었다.

민족음악가로 우리 인민들은 물론 해외동포들속에 널리 알려져있는 박형섭선생은 오늘도 여생을 우리 민족음악발전을 위한 연구사업과 후비육성에 바쳐가고있다.

그는 수기의 마감에 이렇게 썼다.

《지혜와 재능은 어느 시대에서나 높이 발휘되는것이 아니다.나에게 지혜를 주고 재능을 준 위대한 어머니-사회주의조국을 위해 나의 열정, 나의 재능을 깡그리 다 바치리라.》

한 민족음악가의 수기집은 일단 여기서 끝났다.울분과 한숨, 눈물로 시작되여 기쁨과 환희로 이어진 수기집에 앞으로 또 어떤 이야기들이 기록되겠는지는 바이 알수 없다.한가지 명백한것은 그 가지가지의 추억들이 다 행복의 이야기로 될것이라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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