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배우 유원준

 인민배우 유원준

주체적영화예술의 찬란한 개화기를 펼쳐온 우리 영화예술인들의 대오에는 온 나라가 다 아는 배우로, 세계적인 명배우로 이름떨친 인민배우 유원준도 있다.

유원준은 우리 나라 첫 예술영화 《내 고향》, 《최학신의 일가》, 《춘향전》, 《위대한 품》, 《밝은 태양아래에서》, 《산정의 수리개들》, 다부작예술영화 《민족과 운명》의 로동계급편 등 수많은 영화들에서 특색있고 매혹적인 연기를 보여줌으로써 우리 인민들뿐아니라 세상사람들에게 조선영화계를 대표하는 관록있는 배우로, 세계적인 명배우로 깊은 인상을 남기였다.

하지만 식민지청년으로서 이리저리 떠다니던 유원준을 따사로운 품에 안아 세계적인 명배우로 키워주신 백두산절세위인들의 한없이 위대하고 고결한 믿음과 사랑에 대하여 아는 사람은 세상에 많지 못할것이다.

유원준은 함경남도 함흥시의 어느 한 리에서 막벌이군의 아들로 태여나 철들기전부터 신문팔이, 남의 집 잔심부름을 해주며 살아왔다.

그러던 그가 해방과 함께 총을 잡고 보안사업을 하다가 예술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것은 우리 나라에서도 예술영화를 만들데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강령적인 가르치심에 따라 예술영화 《내 고향》의 주인공역인 관필역을 맡아안게 되였을 때부터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예술영화 《내 고향》을 몸소 보아주시고 그의 미흡한 연기를 바로잡아주시면서 그가 항일유격대원역을 훌륭히 형상해낼수 있도록 세심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어제날 소박하고 순박한 농촌청년이였던 유원준은 이때부터 수령과 혈연적으로 련결된 혁명적영화예술인으로서의 참다운 인생길을 걷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후에도 여러차례에 걸쳐 유원준을 몸가까이 불러주시고 해방후 처음으로 만든 예술영화 《내 고향》에서부터 출연한 배우이므로 내가 잘 안다고 더없이 친근히 불러주시였으며 외국의 수반들에게도 내가 잘 알고있는 관필이라고 자랑스럽게 소개해주시였다.

물론 유원준의 인생도 우여곡절을 겪을번한 계기가 여러번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걸음을 잘못 옮겨 과오를 범할세라 지켜주시고 보살펴주시고 끝까지 이끌어주신 어버이손길이 있었기에 유원준은 평탄한 길, 곡절없는 길을 걸을수 있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아시고 사랑하시는 유원준의 인생을 곡절없이 빛내여주시려고 각별히 마음쓰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의 사업과 생활에 대하여 각별히 마음쓰시면서 그가 끝까지 당을 따라 변함없이 한길을 걸어가도록 크나큰 믿음과 사랑을 안겨주시였으며 아무런 근심걱정없이 창조사업에 전심할수 있도록 육친의 정을 부어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친히 그와 영광의 기념사진도 찍어주시고 《영원히 한길에서 1966.1.19일을 기념하여 김정일》이라는 고귀한 친필을 사진뒤에 남겨주시였으며 로력영웅칭호를 받고 너무 감격하여 올린 소박한 그의 편지에 《축하합니다. 1997.4.2 김정일》이라는 죽어서도 안고갈 영원한 친필도 안겨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주체87(1998)년 2월20일 다부작예술영화《민족과 운명》 로동계급편 창조성원들을 몸소 접견하여주실 때에도 유원준동무는 90살까지 계속 영화에 출연하라고 힘있는 고무의 교시도 주시였다.

참으로 위대한 장군님은 유원준에게 있어서 위대한 수령님의 품에 안겨 재생의 삶을 누릴수 있게 해주신 은인, 예술가로서의 새 삶을 주체적영화예술발전의 길우에 활짝 꽃피우도록 해주신 위대한 스승, 자애로운 어버이이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이렇듯 크나큰 믿음과 사랑의 힘이 있어 유원준은 인생의 출발도 잘하고 한생 훌륭히 산 예술인, 인민들에게 좋은 인상만 남긴 예술인으로 값있게 살아올수 있었으며 그 믿음에 보답하기 위하여 불치의 병으로 앓는 몸임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장군님께 기쁨을 드릴 화면을 만드는데 자기 심장의 마지막박동까지 깡그리 바칠수 있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가 우리 곁을 떠나갔을 때에도 아까운 동무를 잃었다고 못내 가슴아파하시면서 그에게 자신의 존함으로 화환도 보내주고 그의 장의를 기관장으로 하며 《로동신문》에도 부고를 내고 그의 유해를 애국렬사릉에 안치할데 대한 은정어린 조치도 취해주시였다.

뿐만아니라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를 위해 생전에 못해준 일이 없었는가를 곰곰히 생각해보시고 수십년전 자신께서 몸소 귀한 약재까지 구해다주시며 육친의 정을 부어주신 그의 막내아들의 인민군대복무소원까지 풀어주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가 우리 곁을 떠난지 두달이 되여오는 주체 87(1998)년 8월 10일에도 유원준동무의 한생은 빛나는 한생이였다고, 한생을 값있게 살았다고, 시작도 잘 떼고 마무리도 깨끗이 하였다고, 마지막까지 영화를 만들다가 순직하였다고, 그의 한생은 우여곡절이 없고 승승장구하였다고, 참답게 산 그의 인생을 가지고 널리 선전하여야 하겠다고 하시면서 뜨겁게 교시하시였다.

《참으로 유원준동무의 한생은 값있고 나무랄데 없는 한생이였습니다.》

력사는 평범한 한 배우가 위대한 수령으로부터 최상의 믿음, 최상의 사랑을 받은 사실을 그 언제 기록해본적이 없었다.

어제날 평범한 농촌청년을 영화예술계의 주인공으로 품속에 안아 걸음걸음 키워주시고 그의 한생이 우여곡절이 없는 한생으로, 중도반단이 없이 승승장구하는 한생으로 빛나도록 손잡아 이끌어주신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은혜로운 손길, 그 위대한 손길아래 조선의 영화예술인들이 당사상전선의 기수로, 혁명적예술인으로 성장할수 있었으며 그 위대한 손길아래 주체의 문학예술의 찬란한 개화기도 일대 전성기도 펼쳐질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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