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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민요의 명창들
리 동 백
1866년경에 충청남도 비인군(당시의 지명임)에서 출생하여 8살부터 13살까지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하였다.
남달리 예술에 취미를 가졌던 리동백은 당시 명창으로 알려진 김정근과 김세종에게서 노래를 배우면서 판소리의 창법을 체득하게 되였다.
20살을 전후하여 혼자서 약 2년간 소리의 수련을 쌓았으나 그것이 부족하다고 생각되여 깊은 산속에 가서 3년간 소리를 련마하였다.
그의 나이가 30대중반에 이른 1901∼1902년경에 경상남도 창원군 창원읍에서 가창활동을 벌렸다.
그후 1911∼1912년경에 서울에서 선배들인 김창환, 송만갑과 함께 창극운동을 벌리다가 연흥사 , 광무대, 협률사 등으로 소속을 옮겨가면서 여러차례에 걸친 지방순회공연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송만갑, 정정렬과 함께 《조선성악연구회》를 조직하고 후비양성에 힘쓰기도 하였다. 그는 1939∼1940년경에 은퇴기념출연으로 전국의 대도시들을 순회하면서 관람자들의 절찬을 받았다고 한다.
《심청가》를 비롯한 판소리를 잘 불렀던 그는 전라도 민요인 《새타령》을 부르는데 특기가 있었다고 한다.
송 만 갑 (1856-1925)
전라북도 구례군 봉북리에서 명창 송우룡의 맏아들로 출생하였다.
그는 어린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명산들과 명승지들을 찾아다니며 노래를 배워 13살부터 명창으로 알려 졌다.
그의 노래가 점점 세련되고 나이도 청춘기에 이르자 노래의 창법에서 가문의 전통적인 전래의 법조를 그대로 이어나가지 않고 시대의 요구에 맞게 다듬고 통속화하였다.
이에 격분한 아버지 송우룡은 송씨가문의 전통적인 소리의 법통을 말살한다고 대노하였다.
그러나 송만갑은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고 기어이 자신의 소리와 창법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완고한 아버지는 아들에게 독약을 풀어주면서 죽을것을 강요해나섰다.
이 사건으로 하여 집을 뛰쳐나온 송만갑은 조선팔도를 돌아다니며 노래를 불렀다. 그 과정에 그의 가창력은 더욱 세련되여 명창중에서도 제일명창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그는 전래의 창법을 현대적으로 다듬어나가면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내놓았다.
《가창가는 세단포목상(비단과 무명장사)과 같아서 비단을 달라는이에게는 비단을 주고 무명을 달라는이에게는 무명을 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노래를 불러도 대상의 요구에 맞게 불러야 한다는것이다.
원각사에 판소리의 예술단체가 조직되였을 때 국장 김창환과 함께 기둥이 되여 노래로만 전해오던 《춘향전》, 《심청전》 등을 극으로 만들어 우리 나라의 창극발전에 기여하였으며 말년에는 후비양성에 이바지하였다.
박 동 실(인민배우, 1904-1961)
전라남도 담양군에서 출생하여 어린시절 외할아버지에게서 판소리를 배우고 명창 김재관의 지도를 받아 창력을 높였다.
16살때 원각사에서 창극 《춘향전》의 주역으로 출연하여 《어린 명창》으로 알려지게 되였으며 그후 여러 창극들에서 주역으로 출연하였다.
1930년대에 이르러 여러 도시들에 다니면서 후비양성에 힘썼다. 공기남, 림소향, 조상선, 조해숙, 김소희 등을 양성하고 그들로 판소리와 민족음악들을 공연하였다. 광복이후 민족음악발전을 위하여 힘써오다가 공화국북반부에 들어와서 조선고전음악연구소, 국립고전예술극장에서 창극배우로, 민족성악강사로 후비양성에 힘썼다.
1956년에 공훈배우로, 1961년에 인민배우로 된 그는 많은 작품들을 창작하였는바 《보천보의 출진》, 《로량대전》 등 수편의 판소리작품들과 《새로운 조국》 외에 7편의 찬가, 20여편의 단가들 그리고 창극 《춘향전》, 조상선과 합작인 《리순신장군》, 정남희와 합작인 《심청전》 등을 창작하였다.
김 창 룡
1872년경 충청남도 서천군에서 출생하였다.
당시 명창으로 널리 알려진 김정근의 아들로 태여난 김창룡은 7살때부터 판소리를 공부하기 시작하여 13살때에 이르러 소리의 갈래를 알게 되였다.
그후 아버지의 친구인 리날치에게서 1년간 배운 후에 홀로 소리를 련마하고 김창환, 박기홍 등의 선배들을 따라다니면서 견문을 넓혔다.
1904년경에는 서울에서 《연흥사》창립에 공헌하였으며 송만갑, 리동백, 정정렬 등과 함께 《조선성악연구회》에 참가하여 후비양성에 힘썼다.
그의 특기는 창극 《심청전》중에서 《꽃타령》이였다고 한다.
정 정 렬
1876년경에 전라북도 익산군 내촌리에서 출생한 그는 어린 시절에 소리의 전도가 촉망되여 부모들은 노래공부를 시키기로 결심하고 서당에서 일정하게 학문을 터득시킨 후에 당시 국창으로 널리 알려진 정창업으로부터 창법을 배우게 하였다.
그후 14살경에는 리날치에게서 소리를 배우다가 그가 사망하자 독학으로 기량을 련마해나갔다. 그는 만사를 잊어버리고 노래공부에 전념하다가 익산군 신곡사와 충청남도 홍산의 무량사, 공주의 갑사로 절간들을 옮겨가면서 40살 전후까지 노래공부를 하였다.
이렇게 혼자서 노래공부를 한 정정렬은 경상남도 마산에 가서 수년간 소리를 지망하는 청소년들에게 판소리를 배워주었다.
그후 50대에 들어서면서 서울로 옮겨와서 송만갑, 리동백, 김창룡 등과 함께 《조선성악연구회》를 조직하고 상무리사로 활약하였다.
그가 60나이에 림방울, 리화중선, 박록주, 김소희와 함께 《빅타》레코드에 창극 《춘향전》, 《심청전》 등을 취입하여 그것이 오늘에 와서는 귀중한 음악유산으로 되고있다. 1938년경에 사망하였다.
리 화 중 선
1898년경에 경상남도 부산에서 출생한 그는 빈궁한 가정에서 자라나 17살에 전라북도 남원으로 시집을 가서 길쌈과 물긷기, 방아찧기로 고달픈 나날을 보내던중 협률사의 명창들이 이곳에 와서 공연하는 창극을 보고 자기도 노래를 배워서 저렇게 광대가 되리라는 결심을 품고 집을 탈출하였다고 한다.
그후 복잡한 경로를 거쳐 서울로 올라온 후 정정렬, 림방울, 박록주, 김소희와 함께 《빅타》레코드에 창극 《춘향전》을 취입하였는데 월매의 역을 수행하였다.
이밖에도 《소상팔경》, 《강상풍월》을 비롯한 단가들을 《오케》레코드에 취입하엿다.
음색이 뛰여나게 아름다와 녀류명창으로 널리 알려 졌다.
1943년경에 일본에 건너가 조선인부락들을 찾아다니며 순회공연을 하던 도중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림 방 울 (1906-1961)
전라남도 광산군 송정읍에서 출생하여 명창 공창식에게서 소리를 배운 후 창극들에 출연하였다.
1920년대말엽과 1930년대초에 《빅타》레코드와 《오케》레코드에 정정렬, 리화중선, 박록주, 김소희 등과 함께 창극 《춘향전》을 취입하면서 리도령의 역을 수행하였다.
청구성과 수리성이 알맞춤하게 배합된 시원스러운 소리로 하여 명창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그가 레코드들에 취입한 단가 《쑥대머리》,《호남가》, 《죽장망혜》를 비롯하여 《토끼전》에서 수궁장면의 《룡왕탄식》은 절창이였다.
박 록 주
1904년경에 경상북도 선산군에서 출생하였다.(사망년대는 알수 없음.)
어린시절부터 판소리와 단가들을 배운 그는 서울에 올라와 송만갑, 정정렬로부터 소리를 더욱 련마하여 녀류극창가로 널리 알려졌다.
소리를 맺고 끊는 점이 그의 특색이였다는 기록이 있다.
1930년대초에 정정렬, 림방울, 리화중선, 김소희와 함께 창극 《흥부전》과 《춘향전》을 《빅타》레코드에 취입하였다.
공 기 남 (1917-1971)
1917년 9월 4일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에서 출생한 그는 어린시절부터 노래를 배웠다.
18∼19살때에 전라도 창극단 책임자로 활약하던 박동실에게서 판소리와 륙자배기조의 전라도민요들을 배우고 소리를 더욱 숙련시켜나가면서 전라도 창극단에서 가창활동을 벌렸다. 8.15광복후에는 서울에서 함화진이 이끄는 《국악원》에서 강사로 근무하였다.
1950년 7월 인민군대에 입대, 그후 1951년부터 1962년까지 국립민족예술단 창극가수로 근무하였으며 이 기간인 1960년 10월에 공훈배우로 되였다.
그는 창극 《춘향전》에서 방자역, 리몽룡역으로 출연하였으며 민요극 《선화공주》에서 서동역으로, 《흥부전》의 놀부역 등 많은 작품들에서 주역으로 출연하였으며 《항일의 싸움터를 찾아서》 등을 작곡하고 자신이 연주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1971년 5월 8일에 사망하였다.
림 소 향 (1918-1978)
1918년 10월 22일 경상북도 김천군에서 출생하여 1930년대 중엽에 정정렬에게서 판소리를 배웠다.
1940년경에 《한양창극단》에서 창극배우로 근무하다가 1943년부터는 조선창극단에서 창극배우로 활동하였으며 이 시기 창극 《춘향전》중에서 월매의 역을 잘하여 명배우, 명창으로 알려지게 되였다.
1950년에 공화국북반부로 들어와서 국립민족예술극장에서 배우로 활동하면서 후비양성에 정력하였다.
1952년 12월에 공훈배우가 된 그는 창극 《리순신장군》, 《춘향전》, 《심청전》에서 주역에 출연하였으며 전라도민요인 《륙자배기》와 《단가》, 《물레타령》, 《배꽃타령》, 《진도아리랑》을 부르는데 특기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