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에 길이 전할 영생불멸의 혁명송가를 창작한 작곡가 김원균

《우리 민족끼리》주체112(2023)년 4월 24일

력사에 길이 전할 영생불멸의 혁명송가를 창작한 작곡가 김원균

김일성장군의 노래》와 더불어 새날이 밝고 하루가 시작된다.

김일성장군의 노래》와 더불어 세계를 변혁하는 력사가 창조된다.

김일성장군의 노래》는 세계에 가장 널리 알려진 명곡이며 후세에 길이 전해질 20세기의 재보이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송가들가운데서 <김일성장군의 노래>가 제일 잘된 명곡이다.》

영생불멸의 혁명송가 《김일성장군의 노래》는 예술적으로 완벽하게 형상된 행진곡적송가양식의 세계적인 명곡이다.

김일성상계관인이며 로력영웅, 인민예술가인 김원균은 불멸의 혁명송가 《김일성장군의 노래》와 《애국가》를 작곡한것으로 하여 우리 인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작곡가이다.

수령송가는 탁월한 수령께 매혹된 민심의 가장 뜨거운 환호의 분출이고 열화같은 숭배심의 폭발이며 다함없는 칭송의 메아리이다.

조선의 작곡가라면 누구나 인민이 사랑하고 력사에 길이 남는 명곡, 그중에서도 수령송가를 짓고싶어 심신을 불태운다. 그러나 욕망이 크다고 하여 혹은 천부적인 음악적재능이 있다고 하여 누구나 수령송가를 지을수 있는것이 아니다.

수천수만의 작곡가가 있다고 하여도 저절로 태여나지 않는것이 수령송가이다. 그것은 수령에 대한 열렬한 매혹과 절대적인 신뢰심을 온넋과 심장으로 받아들이는 음악가만이 창작할수 있는 고귀한것이다.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작곡하던 때 김원균은 29살의 청년이였다.

주체6(1917)년 1월 2일 강원도 원산시의 빈농의 가정에서 태여난 김원균은 해방전에는 날품팔이로 겨우 명을 이어가던 막벌이군, 갖은 수모와 천대를 받던 뼁끼쟁이였다. 그는 작곡가도 아니였고 음악전문교육을 받은 경력도 없었다.

그러던 그가 태양송가를 작곡하게 된데는 깊은 사연이 있었다.

주체34(1945)년 10월 어느날 그는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을 모시게 될 군중대회장을 꾸리는데 참가하였다. 그는 성수가 나서 사람들과 함께 솔대문도 세우고 구호도 도맡아 썼다.

구름 한점 없이 맑게 개인 10월 14일 아침 대회장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성원으로 연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게 된 그의 마음은 세차게 설레이였다. 얼마나 이날을 손꼽아 기다려왔던가.

경모의 마음안고 연탁을 우러르고있는데 사회자의 발언이 있은 후 절세의 애국자 김일성장군님께서 나서시였다.

우뢰와 같은 만세소리가 천지를 진감했다.

연탁 가까운 위치까지 군중에게 떠밀리우며 그는 위인흠모의 열기를 온몸으로 감수했다.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은 너무나 젊으신 모습, 예지로 빛나는 안광, 힘있고 우렁찬 목소리에 저도모르게 매혹되였다.

장군님의 연설이 끝나자 천지를 진감하는 만세소리가 또다시 터져나왔다.

김원균은 그 광경을 직접 보며 흥분을 억제할길이 없었다.

(이 나라, 이 민족이 생긴이래 처음 보는 오늘의 이 감격을 영원히 기록해놓을수는 없을가. 저 환호성을 선률에 담을수만 있다면…)

소질은 있었지만 가난에 쫓기우며 음악학교문전에도 가보지 못한 자신이 막 한스러웠다.

그러나 위대한 태양을 노래하고싶어 끓어번지는 감정의 용암은 분화구를 찾아 서서히 솟구치고있었다.

달아오른 김원균의 마음에 불꽃을 튕겨주는 한편의 가사가 1946년 여름 어느날 그의 손에 와닿았다.

그것은 리찬선생이 작사한 《김일성장군의 노래》였다.

불길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는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흥분을 누를길 없어 그달음으로 시인을 찾아갔다.

시인에게서 받아안은 충격은 더욱 컸다.

《<김일성장군의 노래>의 가사는 항일의 녀성영웅이신 김정숙녀사께서 쓰셨다고 해야 할거요. 나는 다만 녀사의 가르치심을 가사에 담았을뿐이요. 녀사께서는 <김일성장군의 노래>가사가 완성된 다음 방송을 통하여 이 가사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 곡을 짓는데 광범한 대중을 망라시킬수 있을것이라고 하시였소.》

그에게는 시인의 그 말이 바로 동무같이 망국노의 설음을 뼈저리게 체험한 사람이 수령송가를 작곡하여야 한다는 인민의 명령으로 들려왔다. 불현듯 일제의 발굽밑에 신음하던 지난날이 어제런듯 생생히 떠올랐다. 잡화장사군, 양잠공장의 품팔이군, 그 다음에는 간판점의 뼁끼쟁이, 나중에는 철공소의 선반견습공, 왜놈병기소의 공구제도공으로 죽지 못해 살아가던 그때 가슴속에는 피눈물과 설음이 가득차있었다.

허나 그 비애의 선률조차 마음대로 터칠수 없었던 지긋지긋한 세월이였다.

해방을 맞이한 다음날 그가 새 조선의 첫 노래인 동시에 자기의 첫 작품인 《조선행진곡》을 창작할수 있은것은 예술적재능의 산물이기 전에 극적인 운명전환을 하게 된 크나큰 격정과 환희의 분출이였다.

그 노래를 목청껏 부르고불렀지만 왜서인지 허전했던 까닭, 가슴에 응어리졌던 설음의 선률을 깡그리 가셔내자고 했지만 속이 후련하지 않은 원인을 김원균은 《김일성장군의 노래》가사의 구절구절을 읽으며 비로소 찾았다.

(나 김원균을 포함한 백의민족은 단순히 식민지노예살이의 멍에만 벗어던진것이 아니라 장군님의 은덕으로 새 조선의 인민으로 완전히 새로 태여난것이다. 금수강산을 진감시킨 40만의 환호성은 김일성장군님을 우러러 터친 3천만조선동포의 고고성이다!

내 비록 작곡가는 아니지만 기어이 그 고고성을 김일성장군님 만세의 선률로 만들리라.)

심장이 터질듯한 흥분을 금치 못하며 열혈청년 김원균은 절세의 애국자 김일성장군님의 조국개선을 열광적으로 환호하던 그날의 군중대회장을 다시 찾았다. 때없이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청사의 불밝은 창문을 바라보며 밤길을 끝없이 거닐기도 했다.

태양의 송가를 고대하는 인민의 청원편지들도 눈앞에 얼른거리였다. 민심의 그 열기로 달아오른 그의 심장에서 마침내 선률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열정에 넘쳐 《김일성장군의 노래》의 선률을 오선지에 다 올렸을 때에는 동녘하늘이 희붐히 열리기 시작하였다.

밝아오는 새날의 태양을 바라보며 그는 목청껏 노래를 부르고 또 불렀다.

그가 당시 음악동맹의 한 일군을 찾아가 악보를 보였을 때 그 일군도 흥분을 금치 못하였다. 며칠후 어느한 회의뒤끝에 음악시청회가 열리였다.

그는 거기서 김일성장군님을 또다시 뵈옵게 되였다.

영생불멸의 혁명송가 《김일성장군의 노래》가 처음 연주된 그날 폭풍같은 박수갈채가 장내를 뒤흔들었다.

재청을 받아 다시한번 연주가 진행되였을 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노래가 아무리 좋아도 절대로 보급해서는 안된다고 교시하시였다.

한없이 겸허하신 그이를 우러르며 김원균은 마음속으로 웨쳤다.

(장군님, 민족의 머리우에 태양이 솟아올랐기에 《김일성장군의 노래》가 나올수 있었습니다. 저는 다만 인민의 심장에서 분출되는 흠모의 감정을 오선지에 올린 평범한 채보자일뿐입니다.)

영생불멸의 혁명송가가 창작된 다음해인 주체36(1947)년 5월 1일 북조선인민위원회는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작곡한 공로로 김원균에게 표창장을 수여하였다. 그것은 세기와 인류의 념원을 훌륭하게 형상한 그에게 조국이 안겨준 빛나는 칭호였다.

노래는 무엇을 형상하는가에 따라 그 생명력이 결정된다.

김일성장군의 노래》가 창작된지 거의 80년이 되여오는 오늘도 우리 인민뿐 아니라 세계 진보적인민들은 영생불멸의 주체사상을 창시하시고 인류의 자주위업에 불멸의 공헌을 하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를 세계혁명의 위대한 령도자로, 인류의 영원한 태양으로 높이 칭송하면서 그이에 대한 다함없는 신뢰와 흠모심을 이 혁명송가와 더불어 한껏 터치고있다.

김일성장군의 노래》는 혁명과 건설의 노래, 투쟁과 전진의 노래, 미래와 희망의 노래로 세계에 공인되였다.

김원균은 영생불멸의 혁명송가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작곡한것으로 하여 세계적인 작곡거장으로서의 명성을 누리게 되였다.

김원균은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작곡한 다음해인 주체36(1947)년에 《애국가》를 작곡하였다.

그외에도 《민주청년행진곡》(당시), 《투쟁가》, 《우리의 최고사령관》, 《반제투쟁가》, 《영광빛나라 조선로동당》, 《빛나라 청봉숙영지》, 《충성의 노래를 드리옵니다》를 비롯한 훌륭한 가요들을 창작하였다.

김원균은 말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위대성이 <김일성장군의 노래>가 나올수 있게 한 토양으로 되고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만민의 절대적인 신뢰와 열렬한 흠모가 이 노래의 줄기가 되고 잎이 되고 꽃이 되였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지구에서 인류가 살아가는한 <김일성장군의 노래>는 인류와 더불어 영원할것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수령님에 대한 혁명송가가운데서는 《김일성장군의 노래》가 제일 좋다고 하시였으며 작곡가 김원균동무는 《김일성장군의 노래》하나만으로도 한생에 할 일을 다한것으로 된다고 하시면서 그의 창작활동을 높이 평가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김원균선생을 작곡계의 로장으로 위대한 수령님앞에 내세워주시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의 공적을 거듭 높이 평가하시였으며 그에게 안겨주실수 있는 모든 영광을 다 안겨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의 건강을 념려하시여 진귀한 보약재들을 마련하여 보내주시였으며 생일 80돐을 맞는 그에게 은정깊은 생일상을 보내주시고 《김원균음악회》를 성대히 열도록 하여주시였다. 그리고 주체95(2006)년 5월 9일에 이전 음악무용대학의 명칭을 김원균명칭 평양음악대학으로 명명하도록 하여주시여 《김일성장군의 노래》와 함께 그의 인생을 끝없이 빛내여주시였다.

이 세상에 음악이 생겨 명곡이라고 불리우는 곡들은 얼마나 많으며 인간을 노래한 음악은 또 얼마나 다양한가.

영생불멸의 혁명송가 《김일성장군의 노래》는 절세의 위인에 대한 전인민적인 열화같은 숭배심과 매혹의 감정을 가장 진실하게 노래한 명곡중의 명곡이다.

세월이 흘러도 위대한 수령님의 혁명생애와 불멸의 업적은 《김일성장군의 노래》와 더불어 길이 빛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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