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연출가 박학

주체106(2017)년 7월 18일

영화연출가 박학

우리 나라의 영화계의 재사로 각광을 받아온 인민배우 박학은 1914년 12월  6일 평양의 경상골에서 자그마한 철공소를 운영하는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어린시절 평양장안이 좁다하게 돌아치면서 극장과 영화관, 명창들의 노래공연장에 열심히 찾아다닌 박학은 철이 들기 시작할 무렵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콩나물장사, 물장사를 하면서 가정살림을 돕지않으면 안되였다.

온 몸을 짓누르는 가난한 살림이였지만 향학열에 불타던 박학은 서울에 가서 학교를 다니였으며 나중에는 일본에 건너가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예술과에 들어가 극예술을 전공하게되였다.

1936년 학비난으로 대학을 중퇴한 그는 조국으로 돌아와 평양과 서울 등지에서 진정한 민족예술을 해보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이 시기 날로 우심해지는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으로 하여 진보적예술작품은 물론 조선말로 된 연극이나 영화도 창작공연할수없었다. 꿈과 희망은 컸으나 그것을 실현할수없게 된 박학은 언제나 애수와 비애에 젖어있었으며 식민지예술인의 한탄스러운 처지를 두고 몸부림쳐야 하였다.

만고절세의 애국자이신 전설적영웅 김일성장군님께서 령도하신 피어린 항일대전의 승리로 조국해방을 맞이한 그는 진보적인 연극인들과 함께 서울에서 극단《예술좌》를 결성하고 공연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들이 무대에 올린 첫작품은 위대한 주석님께서 조직령도하신 항일무장투쟁을 형상한 연극《독립군》(조령출 작)이 였는데 박학은 연극에서 영광스럽게도 위대한 김대장역을 형상창조하였다.

연극을 본 관중들의 반향은 대단하였다.

우익세력의 거두로 자처하던 김구까지도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나는 아직 김일성장군님을 만나뵙지 못했는데 이 무대에서 뵈웠다고 격정을 토로하였다고 한다.

한편 반동들은 첫날부터 이 작품의 공연을 파탄시키려고 악랄하게 책동하였다.악질반동들은 박학을 비롯한 여러명의 출연자들을 구타하고 랍치구금하는 소동을 벌렸는가 하면 부산지방공연때에는 2층에서 무대에 수류탄이 날아와 터지는 참상도 빚어졌다.

수류탄파편에 박학은 팔에 심한 부상을 당했으나 그와 그의 동료들은 공연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이에 질겁한 적들의 탄압과 책동은 날이 갈수록 더욱 우심해졌다.

더는 남조선에서 공연할동을 할수없게 된 박학은 동료들과 함께 1948년 8월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품을 찾아 공화국북반부에 들어왔다.

고마운 어머니조국은 박학의 희망과 재능을 귀중히 여기여 해방된 조선의 첫 영화예술인대오에 세워주었다.

인간의 존엄과 재생의 기쁨을 안겨준 김일성장군님의 믿음과 사랑에 실천으로 보답하려는 박학의 결의와 노력은 남달랐다.

그의 재능과 비상한 열의는 해방후 첫 예술영화 《내 고향》창작에서 잘 나타났다. 그는 이 영화에서 부정인물인 악질적인 경방단장 최인달역을 잘 수행하여 영화를 성공시키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뿐만아니라 그후 예술영화 《용광로》,《초소를 지키는 사람들》의 주인공역도 훌륭히 형상창조하였다.

조국해방전쟁시기에 창조된 예술영화 《또다시 전선으로》, 《비행기사냥군조》,《정찰병》 등에서도 그는 주인공으로 출연하여 관록있는 배우로 되였다.

전후시기에는 《다시는 그렇게 살수없다》,《형제》,《준령을 넘어서》,《동이 튼다》,《두만강》 등에서 주인공 또는 주역으로 출연하여 진실한 역형상으로써 관중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영화창조과정에 발현된 박학의 예술적재능을 헤아려보신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를 영화창작단의 사령관인 연출가로 내세워주시였다.

연출가가 된 다음 그가 처음으로 만든 영화는  예술영화 《분계선마을에서》였다. 박학은 당의 높은 신임과 배려에 보답하기 위하여 자기의 지혜와 정열을 다바쳐 영화를 사상예술적으로 훌륭히 창작완성하였다.

위대한 주석님께서는 친히 이 영화를 보아주시고 영화가 잘되였다고 높은 평가를 주시고 당정책을 정확히 반영하였을 뿐아니라 현실도 진실하게 반영한 이 영화에 조선영화사상 처음으로 인민상을 수여할데 대한 크나큰 배려를 돌려주시였다.

그이께서는 박학이 연출한 예술영화 《혁명의 길》(한 지대장의 이야기)이 나왔을 때에도 첫 필림을 보아주시고 영화의 제목으로부터 인물의 대사, 혁명투쟁의 본질을 옳게 그리는 문제 등 이 영화를 완성하는데서 나서는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이렇듯 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극진한 사랑과 직접적인 가르치심이 있었기에 박학은 정치적으로뿐아니라 기술실무적으로도 준비된 유능한 영화연출가로 성장할수있었다.

어버이김일성주석님 그대로이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주석님께서 그토록 사랑과 정을 기울여 관록있는 영화연출가로 키워주신 박학이 한생 당의 믿음과 배려를 가슴깊이 간직하고 영화와 함께 값높은 삶을 빛내이도록 정력적으로 이끌어주시였다.

주체51(1962)년 2월 백두산창작단을 새로 무어주실때 박학을 창작단의 연출가로 불러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불후의 고전적명작 《꽃파는 처녀》를 각색한 예술영화 《꽃파는 처녀》를 창작할 때에는 연출을 맡겨주시였다.

실로 눈물없이는 볼수 없는 인정심리극의 세계적인 본보기작품인 예술영화 《꽃파는 처녀》의 매 장면들마다에 위대한 장군님의 세심한 손길이 미치지 않은곳이란 없다.

그런데도 그이께서는 위대한 주석님께 예술영화 《꽃파는 처녀》를 박학동무가 훌륭히 연출하였다고 보고드리였으며 그에게 로력영웅칭호를 수여하도록 크나큰 배려를 돌려주시였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주체64(1975)년 6월 백두산창작단 창작가들에게 위대한 주석님의 혁명력사와 혁명적가정을 반영한 첫 수령형상작품으로서 예술영화 《누리에 붙는 불》을 창조할데 대한 과업을 주시면서 이 영화의 연출을 친히 박학에게 맡겨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특별신임에 의하여 력사적인 첫 수령형상영화의 연출을 맡은 박학은 어깨가 무거워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는 영화를 위대한 장군님의 의도대로 훌륭히 형상하리라 마음먹고 나섰으나 우리 나라 영화계의 새 력사를 창조하는 사업인지라 어려움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박학이 겪는 고충과 애로들을 헤아리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를 여러차례  몸가까이에 부르시여 영화창작에서 나서는 원칙적인 문제들에 대한 완벽한 해명을 주시였다.

드디여 주체66(1977)년 4월 15일을 맞으며 우리 나라에서 창작된 수령형상의 첫 예술영화 《누리에 붙는 불》을 위대한 김일성주석님께 올리여 영화를 아주 잘 만들었다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 나날에 수령형상영화창조에 관한 위대한 장군님의 사상과 리론으로 튼튼히 무장하고 예술적으로 원숙해지고 대담해진 박학은 이어 혁명영화 《첫 무장대오에서 있은 이야기》와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을 형상한 혁명영화 《미래를 꽃피운 사랑》을 연출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그는 이어 숨돌릴새 없이 또다른 혁명영화창조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병약한 육체는 그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다.

새로운 혁명영화의 창작을 위하여 밤잠을 잊어가며 분투하던 그의 심장은 1982년 11월 11일 애석하게도 고동을 멈추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68살이였다.

사실 그는 40대에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였다.

그는 젊어서부터 난치의 병이 있어 1년치고 반년은 병상에서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있었다.

그가 40대에 이르렀을 때 그의 병을 진찰한 한 이름있는 의사는 《재사단명이라더니 박학이라는 사람이 아깝소. 50을 못 채우겠구만. 》라고 유감을 표명하였다고 한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박학의 이런 병세를 료해하시고 하해같은 은총을 끝없이 베풀어주시였다.

그이께서는 박학을 만나실 때마다 그의 건강을 념려하시였고 병이 악화되는 기미만 보이면 창조사업에서 뚝 떼여 치료에 전념하도록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그리고 여러차례에 걸쳐 병치료에 특효가 있다는 약들을 친히 마련하시여 보내주시였을 뿐아니라 공기좋고 치료조건이 좋은 곳에서 집중치료를 받도록 적극적인 대책을 세워주시였다.

박학에게 기울이신 그이의 정성은 참으로 지극한것이였다.

50고개를 못 넘기리라던 그의 생은 김정일장군님의 따뜻한 은정속에서 근 20년을 더 연장하였으며 그동안에 그는 자기 생애에서 가장 성공적인 명작들을 창조할수 있었다.

박학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에 접한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아픈 마음을 달래시며 박학동무는 해방후 첫 예술영화 《내 고향》에 출연한 때로부터 30여년간 좋은 영화들을 많이 창작한 재능있는 연출가였다고 그의 생애를 추억하시면서 신문과 방송에 부고를 내여 재능있는 영화연출가가 세상을 떠났다는것을 알게 하고 장의도 사회장으로 잘 할데 대하여 가르쳐주시였다.

그의 령전에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의 이름으로 된 화환이 놓여있었다.

우리 인민의 추억속에 소중히 자리잡고있는 김일성상계관인, 로력영웅, 인민배우 박학은 오늘도 신미리애국렬사릉에서 전진하는 우리 조국과 함께 영생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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