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의 사랑을 받는 화술배우로 되기까지/ 오향문

인민의 사랑을 받는 화술배우로 되기까지

주체112(2023)년 10월 19일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혁명동지들을 자신처럼 믿고 사랑하시였으며 동지들에게 주실수 있는 사랑을 다 안겨주시였습니다.》

우리 공화국의 인기있는 화술배우들중에는 재치있는 화술로 다양한 작품들의 역형상을 훌륭히 해낸것으로 하여 언제나 관중들의 절찬을 받군 한 오향문도 있었다.

하다면 그가 어떻게 되여 우리 인민의 사랑을 받은 재능있는 화술배우로 될수 있었는지.

나라없던 세월에 누구나 겪은 생활이지만 오향문도 모진 세월의 풍파속에 불우한 생활을 거치지 않으면 안되였다.

1921년 강원도의 어느한 오막살이집에서 태여난 그에게 차례진 운명은 처음부터 너무도 가혹한것이였다.

두살 잡히자마자 어머니를 잃은 그는 아버지의 등에 업혀 이집저집 동네 아주머니들의 젖을 얻어먹으며 자랐다.

어머니의 사랑을 모르고 항시 배고픈 설음, 한지에서 추운 겨울밤을 지내야 하는 설음을 다 겪으며 자란 그는 14살이 되던 해에 돈을 벌어야겠다는 한가닥 희망을 안고 서울로 갔다.

서울 종로거리 철물상점의 배달부로 일하던 오향문은 거래를 많이 하던 극단에서 철물장치를 운반해주는 대가로 연극을 무료로 관람하군 하였다. 그 나날에 배우가 될 희망을 가진 그는 모진 고생과 학대를 이겨내고 어느한 극단의 심부름군으로 들어갔으며 몇년후에는 연극배우가 되였다.

하지만 그의 희망은 다시 절망의 나락속에 빠져들어갔다. 일제놈들의 항시적인 위협공갈과 탄압으로 운영난에 허덕이던 극단이 얼마 못가서 해산되였던것이다.

해방을 맞은 서울에서 예술다운 예술을 해보려는 희망을 안고 그중 한 연극단에 소속되여 배우생활을 시작하였지만 그 희망 역시 된서리를 맞고말았다.

해방자의 탈을 쓰고 미제가 기여든 괴뢰지역에서는 진보적예술단체들이 해산되고 예술인들도 감옥에 끌려갔던것이다.

오향문도 4년간이나 서대문형무소에서 감옥살이를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출옥한 후에도 놈들의 마수를 피해 경상도의 여기저기로 숨어다니였다.

그 나날 인민의 꿈과 희망이 꽃피는 공화국을 끝없이 동경하던 오향문은 조국해방전쟁이 일어나자 인민군대의 서울해방과 함께 의용군에 입대하였으며 그리도 갈망하던 공화국의 품에 안겨 자기의 희망대로 연극배우가 되였다.

당시 연극배우로서 오향문의 소리는 천성적으로 연약하였다. 연극계에서는 그가 배우로서 성공할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나 없었다.

바로 그러한 때인 주체60(1971)년 11월 어느날 아직 그 누구도 포착하지 못한 오향문의 화술에서 남다른 재능의 싹을 발견하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그를 번역영화화술배우로 내세워주시였다.

번역영화화술배우로 생활하던 기간 그는 위대한 장군님을 여러차례 만나뵙고 번역영화와 관련한 구체적인 가르치심을 받으며 자신의 높은 예술적기량과 자질을 갖추어나갔다.

어느해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가 배역록음한 어느한 영화를 보시고 오향문동무가 배역록음을 아주 잘하였다고 분에 넘치는 평가의 말씀을 하시였다.

그의 소박한 예술적기량을 높이 평가해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가 70돐생일을 맞을 때에는 은정깊은 생일상도 보내주시였으며 그후에는 그의 건강상태를 념려하시여 고급승용차도 선물로 안겨주시였다.

이런 하늘같은 사랑과 믿음속에 그는 김일성상계관인, 인민배우로 자라날수 있었으며 인민들의 사랑을 받는 화술배우로 될수있었다.

언제인가 우리 나라를 방문하였던 이전 쏘련의 유명한 녀류영화연출가인 따찌야나 리오즈노바는 오향문에 대해 이렇게 말한적이 있다.

《나는 쏘련의 찌호노브를 세계적인 배우로 인정하고있었다. 그러나 조선에 와서 생각을 달리하였다. 조선의 영화인들이 해설한 〈17일동안에 있은 일〉은 우리가 이룩한 영화의 형상수준을 훨씬 초월한 영화이다.

그중에서도 슈틀리쯔역을 수행한 배우는 정말 재능있는 배우이다. 나는 여러 나라의 번역배우들을 대상해왔지만 이렇듯 세계적인 배우의 수준을 릉가하여 그의 연기를 원숙하게, 풍만하게, 재치있게 돋구어낸 그런 번역배우는 보지 못하였다. 그는 당당히 세계적인 화술배우라고 말할수 있다.》

이렇듯 인민의 사랑을 받는 화술배우로, 세계적인 화술배우로 자라나도록 걸음걸음 손잡아 이끌어주신 위대한 장군님의 극진한 보살피심이 있어 오향문은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문학예술사에 뚜렷한 자욱을 남길수 있었다.

그가 오랜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오향문을 애국렬사릉에 안치하도록 하시고 그의 아들딸들을 모두 아버지의 대를 이어 예술인으로 키우도록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그의 한생은 사람들에게 운명을 지켜주고 보살펴주는 은혜로운 품이 있어야 희망도 꽃피울수 있고 그토록 환희롭고 행복한 생활을 누릴수 있다는 귀중한 진리를 새겨주고있다.

오향문(영화배우)

                      • 1921년 3월 13일 강원도에서 출생.

                      • 1938년부터 서울의 여러 극단에서 활동.

                      • 1950년 조선인민군대에 입대.

                      • 1952년부터 국립연극단, 1971년부터 조선예술영화촬영소 배우로 활동.

                      • 2000년 10월 9일 사망.

                      • 김일성상계관인, 인민배우.

오향문은 우리 인민의 사랑을 받은 재능있는 화술배우였다.

어제날 나라잃은 식민지소년의 민족적설음을 안고 갈 곳 없이 방황하던 그는 공화국의 품에 안겨서야 참된 삶의 보금자리를 찾았고 자기의 재능을 마음껏 꽃피울수 있었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그의 천성적인 재능을 귀중히 여기시고 걸음걸음 손잡아 이끌어주시여 우리 나라 영화예술계의 손꼽히는 화술배우로 내세워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각별한 보살피심과 사랑속에서 김일성상계관인으로, 인민배우로 빛나는 삶을 누린 오향문의 한생은 우리에게 참다운 인생철리를 깨우쳐주고있다.

나라없던 세월에 누구나 겪은 생활이지만 오향문도 모진 세월의 풍파속에 불우한 생활을 거치지 않으면 안되였다.

1921년 강원도의 어느 한 오막살이집에서 태여난 그에게 차례진 운명은 처음부터 너무도 가혹한것이였다.

두살 잡히자마자 어머니를 잃은 그는 아버지의 등에 업혀 이집저집 동네 아주머니들의 젖을 얻어먹으며 자랐다.

사람들은 이런 오향문을 두고 저 어린것이 불행을 타고났다고 말하군 하였다. 사람들의 그 동정이 싫어서인지 아버지조차 말을 갓 배우기 시작한 오향문에게 어머니에 대한 말을 일체 하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5살 되던 해 봄이였다.

어머니품에 안겨 응석을 부리는 제 나이또래 아이들을 부러워하던 오향문은 아버지에게 자기는 왜 어머니가 없는가고 자꾸 물었다. 가슴아픈 사연을 말할수 없는 아버지는 계속 투정질하는 아들의 정상을 보기 딱했던지 하루는 그의 손목을 잡고 마을가까이에 있는 산비탈에 올랐다. 철쭉꽃이 피여난 한 봉분앞에 아들을 세운 아버지는 《여기에 네 어머니가 있다.》고 말해주었다.

아버지의 그 말뜻을 알기에는 너무도 어렸던 오향문은 다짜고짜로 봉분에 대고 어머니를 불렀다. 거듭 불렀으나 어머니는 아들의 말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종시 대답이 없었다.

열번, 스무번을 소리쳐 부르던 오향문은 그만에야 땅에 털썩 주저앉아 고사리같은 손으로 땅을 허비며 《엄마, 엄마야, 내가 왔어. 이제는 나오려마.》 하고 울음을 터뜨리였다.

정녕 불러도 울어도 대답이 없는 어머니…

그날에야 그는 어머니가 다시는 돌아올수 없는 곳에 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어머니의 사랑을 모르고 항시 배고픈 설음, 한지에서 추운 겨울밤을 지내야 하는 설음, … 이런 설음, 저런 설음을 다 겪으며 그의 나이 어느덧 14살이 되였다.

아직 뼈도 굳기 전인데 그해에 오향문은 돈을 벌어야겠다는 한가닥 희망을 안고 서울로 갔다.

일자리를 얻겠다고 파리떼처럼 몰려드는 인파속에 끼여 다행히도 서울 종로거리에 있는 철물상점 배달부로 겨우 취직한 그는 온몸을 무겁게 누르는 철물밑에서 잔뼈를 굳히였다.

그런 피눈물나는 생활속에서 그에게 예술에 대한 꿈과 지향은 그야말로 우연히 찾아들게 되였다.

서울 종로거리 철물상점의 배달부로 일하던 오향문은 거래를 많이 하던 극단에서 철물장치를 운반해주는 대가로 연극을 무료로 관람하군 하였다.

그 나날에 그는 배우들의 연극창조에 흥미를 가지고 거기에 심취되기 시작하였다. 자기도 배우가 될 희망을 가졌던것이다.

그래서 그는 짬만 있으면 극단들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빈번히 문전거절을 당하였고 어떤 때에는 극장무대뒤에서 배우들의 연기를 훔쳐보다가 발길에 채워 문밖에 나딩굴기도 하였다.

쥐구멍에도 해들 날이 있다고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종내는 어느 한 극단의 심부름군으로 들어갔고 몇년후에는 연극배우가 되였다.

정식 배우가 된 그는 너무 기뻐 밤이 새도록 도로를 거닐며 무대우에 선 자기의 모습을 그려보기도 하였다.

희망의 상상봉에 오르기나 한듯 마음은 마냥 즐거움에 젖어들었다.

그런데 그 기쁨이 채 가셔지기도 전에 오향문은 다시 절망의 나락속에 빠져들어갔다. 일제놈들의 항시적인 위협공갈과 탄압으로 운영난에 허덕이던 극단이 얼마 못 가서 해산되였던것이다.

자기의 소박한 꿈이 실현된것으로 하여 얼마간 희열을 느끼며 살아오던 오향문에게 있어서 이것은 큰 타격이 아닐수 없었다.

이때부터 그는 점차 계급적으로 각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는 진보적예술인들의 영향을 받으며 우리 나라에 대한 일제의 식민지통치에 대하여, 이 세상의 모순에 대하여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해방을 맞은 서울에서 민족의 태양이신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의 높으신 뜻을 받들고 진보적예술단체들이 앞을 다투어 도처에서 조직되자 오향문은 예술다운 예술을 해보려는 희망을 안고 그중 한 연극단에 소속되여 배우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그 희망 역시 꽃망울도 앉기 전에 된서리를 맞고말았다.

해방자의 탈을 쓰고 남조선에 기여든 미제의 지령하에 리승만역도는 진보적예술단체들을 총칼로 해산하는 한편 그에 망라되여있던 예술인들을 감옥으로 끌어갔다.

오향문도 감옥신세를 면할수 없었다. 4년간의 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감옥살이를 하던 그는 이상하게도 석달이 지나 감옥에서 풀려나왔다. 그때 그는 그것이 적들의 모략이라는것을 전혀 알수 없었다. 놈들은 혁명조직의 내부를 와해시킬 목적으로 전혀 련관도 없는 정치범들의 이름을 반동단체인 보도련맹명단에 써넣고 그들에 대한 석방놀음을 벌렸던것이다.

오향문은 그때 적들의 모략에 의하여 날조된 보도련맹가입자라는 오명이 수십년간 자기의 운명을 괴롭힐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후 출옥하기는 하였지만 놈들의 마수가 다시 뻗치는 바람에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경상도에 피신하여 이집저집 숨어다니며 식객노릇을 하였다. 그것도 며칠이지 정말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였다.

아, 세상은 왜 이다지도 모질가. 그는 분노와 고민속에 몸부림을 쳤다. 그 나날속에 북으로 가야만 살길이 열린다는것을 절감한 오향문은 조국해방전쟁이 일어나자 인민군대의 서울해방과 함께 의용군에 입대하였으며 그리도 갈망하던 공화국의 품에 안기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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