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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자랑-민속무용
민족의 자랑-민속무용
오랜 력사적기간 찬란한 민족문화를 창조하여온 조선민족에게는 수천년을 내려오면서 발전시켜온 민속무용의 아름다운 전통과 유산이 있다.
우리 인민은 인류문화발전의 첫시기부터 가무를 즐기면서 다양한 생활과 아름다운 풍습을 반영한 수많은 민속무용들을 창조하였다.
그가운데는 로동생활을 반영한것도 있고 전투생활을 반영한것도 있으며 인간관계와 풍속을 반영한것도 있다.
로동생활을 반영한 민속무용들만 보아도 풍년을 마련한 기쁨, 다음해의 풍작을 바라는 마음을 담아 추던 농악무와 농경가무들, 어업로동생활을 반영한 《봉죽놀이》, 《어부춤》, 수공업로동생활을 반영한 《길쌈춤》, 《야장춤》 등 그 유산이 다양하고 풍부하다.
음악정서적감수성과 률동적표현력이 남달리 뛰여난 우리 인민들은 민족의 고유한 정서적미감을 독특한 춤기법으로 형상하는데서 뛰여난 예술적재능과 슬기를 보여주었다.
우리 인민들은 춤판에서 주로 어깨를 으쓱으쓱하고 발을 들썩들썩하며 둥실둥실 돌아가거나 팔을 너울너울하며 건드러지게 춤추었는데 그 하나하나의 춤가락들은 자세와 동작, 흐름새와 률동에서 세계 그 어느 민족에서도 찾아볼수 없는 고유한 민족적특성을 짙게 나타내고있다.
우리 인민들이 즐긴 민속무용은 다채로운 장단과 배합된 춤가락들이 많은것으로 하여 장단성이 강하고 흥취있으며 건드러진것이 특징이다.
그러한 민속무용들가운데는 북춤, 장고춤, 소고춤, 꾕과리춤과 같이 타악기를 치면서 흥겹게 추는 춤이 있으며 물장고춤, 바가지춤과 같이 생활도구를 가지고 장단을 치며 추는 춤들도 있다.
특히 《장고춤》, 《칼춤》, 《상모춤》과 같은 춤들은 우리 민족의 슬기와 예술적재능이 집중적으로 반영되여있는 대표적인 민속무용들이다.
우리 민속무용은 지방적특성도 강하다.
《돈돌라리》, 《닐리리춤》, 《강강수월래》, 《봉산탈춤》, 《강령탈춤》과 같이 해당 지방마다 고유한 춤들이 많으며 전국각지에서 널리 추어진 농악무와 탈춤도 춤가락과 춤구성에서는 지방마다 특색이 있다.
농악무

예로부터 우리 인민들은 농악무를 사랑하며 즐기였다.
우리 민족의 농악무처럼 민족적색채가 짙고 예술적기교가 높으며 그 형상이 독특한 민속예술형식은 많지 않다.
농업을 위주로 하는 다른 나라들에서도 생산성과를 경축하여 악기들을 연주하고 춤도 추지만 우리 나라 농악무와 같이 징, 꽹과리, 북, 장고, 새납, 소고와 같은 다양한 악기로 변화무쌍한 장단과 흥겨운 선률을 연주하고 다채로운 춤구도를 그리거나 열두발상모와 같이 특색있는 형상수단들이 동반되는 고유한 민속예술형식은 찾아볼수 없다.
장구한 력사의 흐름속에서 시대가 변하고 산천도 변하였지만 우리 인민들의 생활에는 언제나 농악무가 있었고 그에 대한 사랑의 감정도 변함이 없었다.
농악무의 춤구성방식은 여러가지이지만 일반적으로 농악대가 행렬을 지어 걸어가면서 농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는 길놀이, 여러가지 춤과 기악연주, 민요가창으로 다채롭게 구성된 판놀이, 개별적인 춤군들의 장끼가 련속적으로 펼쳐지는 개인놀이로 구성된다.
농악무는 춤판의 규모가 가장 크고 예술적형상이 다양하며 흥취도 강하다.
농악무는 우리 나라 어느 지방에서나 다 진행되였지만 춤구성과 춤가락은 지방적특징이 뚜렷하였다.
상모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상모춤 >은 우리 나라에서밖에 추는데가 없습니다.》
《상모춤》은 그 류형과 형식, 기법과 기교에 있어서 다른 나라 사람들이 흉내조차 낼수 없는 우리 나라에만 있는 고유한 춤이다.
세상에는 별의별 소도구를 만들어 리용한 춤들이 있지만 《상모춤》에서와 같이 모자에 달린 꼭지를 길게 늘이고 손으로가 아니라 머리와 몸을 움직여 기교를 부리며 예술적률동을 펼쳐보이는것은 단 하나도 없다.
《상모춤》은 우리 나라에만 있는 특색있는 춤으로서 더욱 발전시키고 장려하여야 할 귀중한 민속무용유산으로 된다.
봉산탈놀이

봉산탈놀이는 지난날 황해북도 봉산지방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던 탈놀이로서 무용, 노래, 재담 등으로 이루어졌다.
옛날부터 해서지방(황해도일대)의 장터들에서 1년에 한번씩 탈춤놀이가 벌어졌는데 그중에서도 봉산은 유리한 자연지리적조건으로 탈놀이가 더욱 성행하였다.
그리하여 봉산탈놀이는 19세기말기부터 해서탈놀이의 대표적놀이로 발전하였다.
놀이는 주로 농한기와 명절날에 많이 하였다.
이 놀이는 여러가지 형태로 진행되였는데 그가운데서 12개 장면으로 구성된것이 많이 알려지고있다.
사용되는 가면은 상좌, 목중, 사당, 로장, 사자, 량반, 소무, 신장수. 취발이, 말뚝이, 미얄, 덜머리, 원숭이 등이다.
의상은 흰 바지, 저고리에 붉은색, 푸른색, 남색으로 된 등거리, 전복 등으로 화려하다.
여기서 쓰이는 악기는 피리, 대금, 해금, 장고, 북 등이고 음악은 굿거리, 타령곡, 념불곡 등을 연주한다.
봉산탈놀이는 극적줄거리의 전개가 없는 탈춤으로 구성된 부분과 가면극부분으로 나뉘여진다.
탈춤에는 상좌춤, 팔목중춤, 사당춤, 로장춤, 사자춤, 량반춤, 무동춤 등이 속하고 가면극부분에는 로승, 량반, 미얄의 생활 등 독립적인 의의를 가지는 장면들이 있다.
봉산탈놀이는 본격적인 탈놀이에 들어가기전에 《길 놀이》로부터 시작되는데 악사들을 선두로 사자, 말뚝이, 취발이, 소무, 량반, 상좌, 로장 등이 줄을 지어 읍내를 일주한다.
해가 지면 무동춤, 줄타기, 땅재주 등과 풍물놀이로 흥을 돋구다가 탈춤놀이를 시작한다.
처음 4장까지는 봉건시기 중들의 타락한 생활을 보여주며 5장부터 10장까지는 중들의 부패성과 추악성에 대한 폭로, 량반관료의 타락상에 대한 풍자를 내용으로 하고있다.
마감장면에서는 봉건시기의 썩어빠진 사회현실에서 불행과 고통을 겪는 하층인민들의 생활처지를 보여주고있다.
봉산탈놀이는 대사와 춤 그리고 노래가 결합된 놀이로서 매 장면마다에서의 춤종목들과 재담들은 다채롭고 개성적이다.
특히 타령장단에 맞추어 한삼을 뿌리치거나 휘저으면서 추는 춤동작은 약동적이며 활달하다.
인민들속에서 창작되고 그들이 즐긴 봉산탈놀이는 인민들의 행복에 대한 지향과 봉건통치배들을 반대하는 항거의 정신을 반영한 진보적인 내용과 인민적인 춤동작이 들어있음으로 하여 민족무용유산의 하나로 되고있다.
민족의 우수한 문화유산은 력사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끝없이 빛내여가는 참된 애국의 심장속에 간직될 때 그 가치가 빛나기마련이다.
우리 인민들이 사랑하는 봉산탈춤에도 민족의 우수한 문화유산을 귀중히 여기고 길이 전해가기 위하여 마음쓰시던 절세위인들의 불멸의 령도가 깃들어있다.
피어린 항일대전을 승리에로 이끄시여 조국을 찾아주신 위대한 김일성동지께서는 착취사회의 억압에 항거하는 인민의 사상감정을 흥겨운 생활로 엮어놓은 민속무용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시고 해방직후 첫 공연무대에 봉산탈춤을 올리도록 하시였다
온 나라가 새조국건설로 들끓던 주체35(1946)년 어느날 봉산탈춤을 보아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오랜 력사를 가진 춤이 일제놈들에 의하여 파묻혀있었는데 봉산지방에서 그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였다고 그처럼 기뻐하시면서 선조들이 남긴 유산들가운데서 좋은것을 찾아 그것을 우리 인민들의 미감에 맞게 발전시킬데 대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책동으로 사라질번 하였던 봉산탈춤을 다시 찾아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해 11월에는 봉산탈춤보존위원회를 내오도록 하시고 그 원형을 보존할수 있도록 현지촬영을 조직해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민족유산을 주체적립장에서 계승발전시킬데 대한 정책을 제시하시고 봉산탈춤을 비롯하여 우리 선조들이 창조한 우수한 문화유산들을 민족의 재보로 인민들과 후대들에게 안겨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의 높은 뜻을 받들어 위대한 김정일동지께서는 민족문화유산보호사업이 사람들에게 조선민족제일주의를 깊이 심어주는 교양사업으로 되도록 이끌어주시였고 봉산탈춤에 대한 기록영화를 다시 편집하여 완성시켜주시였다.
주체92(2003)년 6월 봉산군 은정리를 찾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우리 선조들이 창조한 우수한 문화적재부를 옳게 계승발전시키는것은 민족의 주체성과 민족성을 고수하고 살리는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고 하시면서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봉산탈춤과 같은 민속무용을 장려할데 대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민족의 우수한 문화유산을 누구보다 사랑하시고 빛내여주신 절세위인들의 숭고한 사랑에 의하여 봉산탈춤은 오늘도 자기의 모습을 자랑스럽게 전해가고있다.
하기에 봉산탈춤은 오늘 봉산사람들에게 있어서 고향땅의 자랑만이 아닌,조국과 민족의 소중한 재보로,유산이기 전에 귀중한 생활로 간직되고있다.



민속무용 《야장춤》
민속무용 《야장춤》은 농쟁기와 창, 칼 등을 벼리던 야장간의 생활을 반영한 로동무용의 하나이다.
무용은 장진, 갑산지방과 랑림지방을 비롯한 산간지대의 야장군들이 추던 민속무용이다.
이 춤은 야장군들의 로동속에서 창조된 무용으로서 농업로동, 일반 세태생활을 반영한 민속무용과 대조되여 이채를 띤다.
《야장춤》은 쇠붙이를 다루는 야장군들의 보람찬 로동생활을 소박한 춤가락에 담고있는데 그 내용에서 메질하는 모습과 로동에 대한 희열을 보여주고있는것이 특징이다.
이 춤에 나오는 기본동작은 병쟁기, 농쟁기를 만들 때의 메질하는 모습을 형상한것이다.
느린 타령장단에 맞추어 첫박에는 왼손바닥으로 가슴을 치고 둘째박에는 오른팔 팔굽을 치며 셋째박에는 오른팔을 펴서 왼손바닥을 오른손바닥으로 내려치는 동작이다.
그리고 망치질하는 모습을 형상한 춤동작으로서는 무릎을 세우고 팔을 굽혀 팔굽으로 무릎을 내려치는 동작이다.
이처럼 《야장춤》에 나오는 동작들이 주로 팔굽을 치는 호탕한 가락들로 되여있기때문에 일명 《팔굽춤》이라고도 하였다.
이 춤은 평민복에다 앞치마를 두르고 추는것이 상례였다.
《야장춤》이 농쟁기를 만들고 벼리는 과정을 보여주는 춤일 경우에는 풀무질을 하는 모습, 모루에 놓인 쇠덩이를 집게로 집어 이리저리 뒤지는 동작, 쇠메를 엇바꾸어 휘두르며 련속 내려치는 동작 등 실지 야장군들의 로동생활을 방불케 하는 춤동작들로 엮어지였다.
민속무용 《야장춤》은 그 내용에 있어서나 형식에 있어서 우리 인민들의 근면한 로동생활을 진실하게 반영한 유산적가치가 큰 무용이다.
강령탈춤
우리 민족의 귀중한 무용유산의 하나인 강령탈춤은 황해남도 강령지방에서 전해져오고있는 탈춤이다.
일반적으로 탈춤은 봉산, 해주 등 교통이 좋고 물산이 풍부하며 상업이 번창한 지역들에서 성행하였는데 옛날 자그마한 고을로 알려져있던 강령지방에서 탈춤이 발전하게 된것은 재능있는 예술인들이 이 지방에 많이 모여 활동하였기때문이라고 한다.

강령탈춤은 먹중춤, 취발이춤, 량반춤 등 8개의 놀이과정으로 구성되여있다. 강령탈춤은 《탈춤령산》에 맞추어 추어졌는데 춤이 끝난 후에 탈군들은 탈을 모두 불살라버리군 하였다.
강령탈춤을 보면 먹중춤을 비롯하여 쌍무로 형상하는 춤들이 많은데 장삼소매를 어깨너머로 힘차게 휘두르며 수행하는 느릿한 장삼춤이 기본이였다.
강령탈춤은 번화한 지역의 탈춤들처럼 다른 지방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해방전 일제의 가혹한 민족문화말살책동에 의하여 급속히 사멸되여가던 강령탈춤은 해방후 우수한 민족문화유산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여 적극 살려나가도록 적극적인 조치를 취해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다시금 재형상될수 있었다. 그리고 전후에는 전국적인 예술축전무대에도 오를수 있었으며 현재까지도 강령지방 인민들속에서 널리 공연되고있다.
강령탈춤은 현재 국가비물질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여있다.
민속무용《고창춤》
개성을 중심으로 한 중부지방에서 추던 민속무용이다.
봉건통치배들을 반대하는 우리 인민들의 투쟁정신과 고역과 가난속에서도 생활을 락천적으로 꾸려가려는 그들의 지향을 반영한 작품이다.
지난날 장풍지방에서는 가을걷이가 끝나면 수많은 사람들이 림진강류역 고랑포라는 곳에 모여 《고창춤》을 추는것을 비롯하여 탈놀이, 농악놀이 등 여러가지 놀이를 많이 하였다. 무용에는 인민들을 대표하는 말뚝이와 녀인들 그리고 봉건관료배를 대표하는 포도비장을 비롯한 부정인물들이 등장한다. 작품은 세개 부분으로 구성되여있다. 첫째 부분에서는 포도비장을 비롯한 착취배들의 위선적이며 횡포무도한 행동을 보여주며 둘째 부분에서는 말뚝이와 녀인들이 착취배들과 맞서 싸워 그들을 몰아내는 광경을 보여준다. 셋째 부분은 포도비장패들을 몰아낸 기쁨을 안고 구경군들까지 합류하여 춤을 추는 환희적인 장면으로 되여있다. 《고창춤》에서 특징적인 동작은 손바닥을 엎었다젖혔다하면서 얼굴을 가리웠다내놓았다하는것과 손을 뿌리치면서 머무르거나 곱디뎌 걷는것 등이다.
민속무용 《방울춤》
민속무용 《방울춤》은 주체68(1979)년에 창작된 작품이다.
아름다운 조국강산에서 살며 일하는 우리 인민의 민족적인 생활정서를 약동적인 춤형상으로 생동하게 보여주고있다.
지난날 우리 나라에는 독특한 울림으로 다양한 리듬을 잡으면서 추는 여러가지 방울춤형식이 있었다.
고구려시기에 싸움터로 나가는 군인들의 전투사기를 돋구어주기 위하여 세가닥으로 달린 방울을 가지고 추던 《삼지령》, 조선봉건왕조시기 궁중에서 금방울을 손에 쥐고 흔들며 추던 《향령무》와 금방울을 모자에 달고 소리를 내면서 추던 《련화대》 등이 대표적인 실례로 된다.
민속무용 《방울춤》은 우리 나라의 이러한 풍부한 방울춤유산가운데서 우수한 형식들을 현대적미감에 맞게 잘 살려 예술무용으로 발전시킨것이다.
무용에는 장미색조끼를 덧댄 저고리와 진록색치마를 입은 녀성무용수 6명이 출연한다.
작품은 두개의 부분으로 구성되여있다.
느린 춤으로 된 첫 부분은 덩덕궁장단의 음악선률과 함께 흥취나는 가요 《일하기도 좋고 살기 좋은 내 나라》의 방창에 맞추어 전개된다.
이 장면에서 무용수들은 하늘을 날으는 종달새와 정답게 이야기하듯 손목을 돌려세우기도 하고 팔굽을 굽혔다 펴기도 하면서 방울을 흔드는 동작을 한다.
방창 2절이 시작되는 대목에서 무용수들은 밀집되였다가 서서히 풀려나가면서 화창한 봄날의 정서를 표현한다.
빠른 춤으로 된 둘째 부분에서는 경쾌한 잦은모리장단의 음악에 맞추어 격렬한 률동으로 방울을 울리며 환희의 정서를 터뜨린다.
음악이 고조될 때 무대앞에 모였던 무용수들은 잦은 뒤걸음으로 순식간에 넓게 퍼져 돌다가 앉으며 절정을 이룬다.
민속무용 《방울춤》은 풍부한 인민적인 생활정서와 짙은 민족적색채, 개성적인 률동형식으로 하여 인민들의 사랑을 받는 특색있는 작품으로 되고있다.
민속무용《꽃등춤》
《꽃등춤》은 녀성들의 정서생활의 일면을 보여주는 민속무용이다.
이 춤은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황해남도 배천지방에서 등불놀이를 성대히 진행할 때에 이곳 녀성들이 즐겨추군 한데서 유래되였다.
《꽃등춤》의 특색과 이채로움은 춤에서 녀성들이 꽃등을 머리에 올려놓고 신비로운 조화를 부리는데 있다.
춤은 불을 켜지 않은 꽃등(머리에 쓸수 있게 관모양으로 만든 꽃등)을 머리에 올린 녀성들이 춤마당가운데에 모여앉아있는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윽하여 도도리장단을 타고 아름다운 음악이 울리면 녀성들이 서서히 일어나 그에 맞추어 푸른 수건을 부드럽게 날리면서 해살모양을 그리며 춤을 추는데 그 춤동작과 춤구도가 특징적이다.
꽃등을 머리에 올려놓고 곧바른 자세를 유지하며 잔걸음으로 오가는 동작, 유연하고 섬세한 팔놀림으로 푸른수건을 부드럽게 날리는 동작 그리고 해살모양을 만드는 구도, 사선으로 어기면서 《X》자를 그리는 구도 등이 그러하다.
《꽃등춤》의 특색과 서정미는 소도구형상에 의해 돋구어지고있다. 특히 꽃등이 그러하다.
꽃등은 손에 들게 되여있을뿐아니라 관모양으로 만든것으로 하여 안전하게 머리에 올릴수도 있게 되여있다.
그런가 하면 춤에서 꽃등은 불이 켜지기도 하고 꺼지기도 하면서 신비로운 조화를 나타낸다.
이렇듯 《꽃등춤》은 예술적으로 세련되고 잘 다듬어진 우리 나라 민속무용의 하나이다.
민속무용 《조리춤》
《조리춤》은 벼종자 고르는 농사일과 결부되여있는 민속무용이다. 일명 《벼종자고르기춤》이라고도 한다.
춤은 평안도의 벼농사고장에서 많이 추어졌는데 그가운데서 평안남도 숙천과 평안북도 염주지방의 《조리춤》이 잘 알려져있다.
지난날 평안도 벼농사고장의 농민들은 벼종자를 고를 때 먼저 큰 가마나 독에 물을 채우고 거기에 벼를 쏟아넣은 다음 벼알들이 일정하게 물에 잦아먹게 되면 조리로 물우나 중간에 떠있는 벼알을 건져내였다. 그리고는 물밑에 가라앉은 벼알만을 벼종자로 쓰군 하였는데 《조리춤》은 바로 농민들의 이러한 농사일과 결부되여 추어지게 되였다.
《조리춤》은 벼종자를 고를 때 리용한 조리를 들고 추는것으로 하여 이채를 띤다.
고유한 춤동작은 조리를 오른손에 잡고 돌리는 동작, 조리를 두드리며 어깨를 가볍게 들썩이는 동작, 조리로 쭉정이벼를 건져내는 동작 등이다.
여기서 조리를 두드리며 어깨를 들썩들썩하는 동작은 매우 인상적이며 풍부한 률동감을 준다.
어찌보면 《농악무》에서 장단을 울리며 춤을 불러내는 상쇠잡이의 흥겨운 춤형상을 방불케 한다.
《조리춤》은 륜무형식으로 추어진다. 춤이 시작되면 자연히 큰 원을 짓게 되는데 앞선 사람을 따라 빙빙 돌거나 원 안팎으로 움직이는 구도가 기본으로 되고있다.
민속무용 《북청사자탈춤》
《북청사자탈춤》은 동해안지방에서 널리 보급된 대표적인 민속무용이다.
함경도 북청지방에서 사자탈춤을 많이 추었는데 해마다 정월대보름날에 가장 크게 놀았다.
《북청사자탈춤》은 대체로 세부분으로 구성되여있다.
첫부분은 닐리리의 초장격인 마당장단(굿거리장단)으로 시작된다. 사자는 장단에 맞추어 동작이 느린 닐리리춤을 추기 시작하는데 위엄이 있으면서도 무엇을 노리는듯 한 기상을 안고있다.
둘째부분은 닐리리장단(타령장단)에 맞추어 추는 넉두리춤이다.
밀림을 돌아치는 용맹한 사자의 기상이 이 넉두리춤에서 잘 표현된다.
셋째부분은 검모리장단(빠른 타령장단)으로 넘어가면서 음악은 더 속도를 내고 북소리는 매우 격동적이다.
사자는 재빠른 동작으로 환희에 넘치는 춤을 춘다.
《북청사자탈춤》은 자기의 독자적인 구성체계와 이야기줄거리를 가진 사자탈춤으로서 동작이 매우 특색있다.
온몸을 흔들며 가볍게 뛰면서 땅을 밟는 동작, 엎드려 머리를 들고 땅을 쫏는 동작, 입을 크게 벌렸다 다물며 소리가 날만큼 이발을 마주치는 동작, 앞발을 들고 곧추 일어서는 동작 등 사자의 행동을 그대로 형상하면서도 장단에 맞추어 춤추는 모습들은 장쾌하고도 신명나는것이다.
매해 정월대보름날을 계기로 크게 판을 벌리군 한 《북청사자탈춤》은 인민들의 생활풍습과 잇닿은 인민적인 탈춤으로서 근로인민들의 념원을 잘 반영한 놀이이다.
민속무용 《류두놀이춤》
예로부터 우리 나라 녀성들은 음력 6월 보름날이 오면 산천의 맑은 물에 머리를 감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날을 류두날이라고 하였고 이날에 진행한 여러가지 놀이를 류두놀이라고 하였다.
류두날에는 부녀자들이 산골짜기의 물맑은 곳을 찾아가 마음놓고 머리를 감기도 하고 목욕도 하였다. 그리고 큰 나무에 그네를 매고 그네뛰기도 하였으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류두놀이춤》에는 바로 이러한 생활내용이 반영되여있다.
이 춤은 녀성들의 즐거운 막춤으로 이루어지며 류두놀이생활모습그대로 녀성들이 머리를 감거나 머리를 빗어내리는 동작, 머리를 땋아올리는 동작 등으로 아주 생활적이고 특색있게 추어진다.
춤동작을 보면 두손을 모아 바가지처럼 만든 다음 물을 퍼서 머리우에 올려뿌리는 동작, 깨끗하게 감은 머리태를 자랑하려는듯 고개를 이쪽저쪽으로 돌리는 동작이 기본이다.
이런 동작들은 녀성들의 머리감는 생활을 그대로 생동하게 표현한 춤동작들로서 이채를 띤다.
류두놀이때 추는 춤은 녀성들이 몸을 깨끗하게 거두고 하루를 즐겁게 보내는 계기로 되였을뿐아니라 봉건적인 예속과 가정적인 부담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행복한 생활을 지향하고 동경할수 있게 하는 싹으로도 되였다.
《류두놀이춤》은 생활적이고 특징적인 춤동작들로 하여 우리 녀성들의 정서와 감정을 잘 반영한 민속무용으로 오늘도 전해지고있다.
민속무용 《자라병춤》
《자라병춤》은 황해도일대에서 많이 추어진 민속무용의 하나이다.
이 춤은 지난날 외래침략자들을 반대하여 무장을 들고 싸움터로 용감히 나가는 우리 인민들의 애국적기개를 반영한 민속무용이다.
예로부터 이 지방 인민들속에서는 녀인들이 싸움터로 나가는 남자들에게 고향의 맑은 샘물이 담긴 자라병을 주어보내는 풍습이 있었다. 이런 풍습이 오랜 세월 흐르는 과정에 《자라병춤》이 생겨났다.
《자라병춤》은 고려시기부터 추어지기 시작하여 조선봉건왕조시기에 성행하였다.
이 춤의 구성을 보면 처음에 남자들이 출전하는 날 이른새벽 녀인들이 샘물터에 나와 자라병에 맑은 샘물을 담는 춤, 샘물이 담긴 자라병을 주고받으며 녀인들과 남자들이 뜨거운 정을 나누는 장면을 보여주는 춤 그리고 기어이 원쑤를 쳐물리치고 돌아오리라는 비장한 각오와 굳은 결의를 다지는 남자들의 무장춤으로 이루어져있다.
춤동작에서 특징적인것은 지방적인 색채가 강한 남자들의 주먹춤과 어깨춤 그리고 칼과 창을 능란하게 다루는 무장춤가락이 위주로 되고 여기에 녀인들의 부드러운 동작이 잘 엮어져있는것이다.
때문에 춤의 전반흐름에는 전투적기백과 박력이 차넘치고 이 지방 녀인들의 향토적정서와 률동이 조화되여있다.
우리 인민의 애국적기개와 황해도지방의 고유한 풍속을 반영한 《자라병춤》은 우리 나라의 풍부한 민족무용유산을 연구하는데서 의의있는 민속무용의 하나로 되고있다.
민속무용 《씨앗밟이춤》
《씨앗밟이춤》은 평안북도 철산지방과 그 일대에서 전해오는 민속무용이다.
지난날 철산지방의 농민들은 음력 2월초하루가 오면 명절놀이로 하루를 즐기면서 기세를 올린 다음 씨붙임준비를 빈틈없이 하군 하였다.
쉴참이나 하루일이 끝나면 북, 장고, 꽹과리를 두드리며 춤을 추군 하였는데 그것이 오랜 기간 전해지면서 《씨앗밟이춤》으로 불리우게 되였다.
이 지방녀성들은 《씨앗밟이춤》을 출 때면 풍악이 울려주는 음악에 맞추어 흥을 돋구군 하였다.
《씨앗밟이춤》은 한손을 가벼이 던지듯하면서 씨를 뿌리는 동작, 두발을 돌려짚기도 하고 대기도 하며 땅을 밟아주는 동작 등 농민들의 근면한 로동모습을 그대로 률동화하고있다.
여기에 몸세를 좌우로 약간씩 쓰면서 기우뚱기우뚱하며 걷는 동작이나 흥이 날 때 보게 되는 어깨춤동작들이 배합되면서 흥치를 한층 돋구어준다.
《씨앗밟이춤》은 이처럼 우리 인민의 봄철씨붙임과 결부되여 추어진 춤으로서 자기의 고유한 특색을 가지고있다.
민속무용 《왕바구니춤》
《왕바구니춤》은 지난날 평안도 덕천지방의 산간지대에서 많이 춘 민속무용이다.
이 춤은 녀성들이 산에 올라가 뽕잎을 따서 왕바구니(큰 바구니)에 가득 담아가지고 마을로 내려오는 생활을 통하여 집체로동의 희열과 생활의 즐거움을 보여주고있다.
《왕바구니춤》이라는 이름은 녀성들이 작은 바구니와 대조되는 큰 바구니를 들고 춤을 춘데서 불리워진것이다.
이 민속무용은 처녀들과 아낙네들이 오솔길덤불을 헤치며 산속의 뽕밭을 찾아가는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뽕밭에 이른 녀성들은 무성하게 자란 뽕잎을 보며 기쁨에 넘쳐 왕바구니에서 작은 바구니들을 하나씩 꺼내든다. 어느새 뽕잎이 바구니에 가득차자 녀성들은 왕바구니가 있는곳으로 찾아와 거기에 뽕잎을 쏟는다.
이윽고 왕바구니에 뽕잎을 가득 채운 녀성들은 그것을 가지고 마을로 내려온다.
이 민속무용에서 특징적인 춤가락은 손목을 꺾으면서 뽕잎을 따는 동작, 가슴앞에서 손벽을 치고 두팔로 메는 동작과 두팔을 펴는 동작이다.
민속무용 《왕바구니춤》은 녀성들의 집단적인 로동생활을 독특한 춤가락으로 잘 살린것으로 하여 지난날 누에를 많이 치던 덕천지방 인민들속에서 사랑을 받았으며 널리 보급되였다.
민속무용 《오동춤》
《오동춤》은 우리 나라 황해남북도지방에서 오래전부터 널리 추어온 민속무용이다.
무용은 오동나무를 귀한 나무로 여겨온 우리 인민의 세태풍습에서 유래되였다.
우리 인민들은 오동나무를 귀하게 여기면서 그에 대한 춤까지 만들어 즐겨 추군 하였다.
춤은 두개의 커다란 오동나무잎사귀가 펼쳐지는 속에 머리를 오동나무꽃으로 장식한 녀인이 손에는 오동나무열매를 쥐고 나오는것으로 시작된다.
처음에는 속이 궁글은 오동나무를 맞부딪치며 느리게 나는 소리에 맞추어 부드럽고 건드러진 춤을 추다가 다음에는 소리를 빨리 내면서 흥취있고 발랄한 률동을 펼치며 마지막에 와서 다시 처음의 느린 부분으로 돌아온다.
춤은 녀인이 오동나무잎속으로 조용히 들어가 자기 모습을 감추는것으로 끝난다.
《오동춤》은 독무형식의 간단한 춤으로서 형상이 잘 째여져있다.
처음에 녀인이 오동나무잎속에서 나왔다가 다시 그속으로 들어가게 한 수법이나 소리를 느리게 내기 시작하여 빠르게 하다가 다시 느린것으로 돌아오게 한 수법은 민속무용의 형상적짜임새를 잘 보여준다.
민속무용 《도리깨춤》
《도리깨춤》은 지난날 우리 나라 농촌에서 낟알을 털 때 하던 로동인 도리깨질과 결부되여 생겨난 민속무용이다.
농민들이 마당에 밀이나 보리를 쭉 펴놓고 도리깨로 휙휙 내리때리는 로동생활을 재현하고있는 《도리깨춤》은 황해남도 연안, 배천지방에서 먼저 생겨났다. 춤에는 여러명의 도리깨군들이 나오는데 여기서 도리깨를 먼저 때리는 사람이 농사일을 가장 잘하는 실농군(주인공)이다.
그가 먼저 도리깨로 낟알을 때리면 다른 사람들은 일제히 그를 따라 그쪽을 두드리고 다른 자리를 때리면 또 다른 자리를 두드리군 한다.
주인공의 가늠에 따라 이쪽저쪽으로 도리깨질의 자리가 옮겨지고 낟알들이 말끔히 털리는 형상이 펼쳐진다.
한마당 가득했던 낟알을 다 털면 도리깨군들의 춤장끼를 보여주는 경연이 진행된다.
이때에도 도리깨군들을 이끌던 사람이 먼저 춤장끼를 보여준다.
도리깨군들은 실농군의 모양을 본따 서로서로 장끼를 보여준다.
장끼동작은 주로 연풍대동작과 발차기동작이였다. 연풍대동작은 몸을 뒤집으며 뛰여돌아가는 동작이고 발차기는 두발을 엇바꾸어 높이 차올리는 동작이다.
장끼를 경쟁적으로 보여줄 때 한사람이 도리깨를 들면 그 높이만큼 차올리는데 가장 높이 차올리는 사람은 모두의 박수갈채를 받는다.
장끼동작들을 경쟁적으로 보여준 다음 모두 도리깨를 메고 한데 어울려 큰 원을 짓고 돌아가면서 《도리깨춤》은 끝난다.
이 춤은 우리 농민들의 고유한 로동생활에서 유래되였기때문에 그들의 근면한 모습과 락천적인 생활풍습이 훌륭히 반영된 민속무용의 하나로 되고있다.
민속무용 《몰이군춤》
민속무용 《몰이군춤》은 오래전에 함경도 화성지방의 산간마을에서 짐승사냥을 하던 몰이군들이 즐겨춘 춤이다.
화성지방은 원래 산이 많고 부침땅이 적은것으로 하여 농사에 불리한 자연지리적조건과 기후적특성을 가지고있었다. 때문에 이 고장 사람들은 짐승사냥을 위주로 하면서 살아왔다.
사냥에는 포수와 함께 흔히 몰이군들이 따라나서군 하였다.
몰이군들은 북과 꽹과리, 징을 두드리고 소리를 지르면서 짐승들을 함정으로 몰아가 잡군하였다.
《몰이군춤》은 사냥생활과정에 몰이군들의 이러한 기쁨이 춤으로 재현되여 오래동안 추어지고 전해져왔다.
이 춤의 구성은 몰이군들이 짐승을 사냥하기 위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는 장면, 짐승을 발견하고 함정으로 몰아가는 장면, 사냥을 끝마친 기쁨으로 들끓는 장면, 이렇게 세 단락으로 되여있다.
이 춤에는 짐승사냥과정의 생활을 률동화한 성격적인 춤동작들이 많다.
허리를 굽히고 두팔을 번갈아 내밀며 숲속을 헤쳐가는 동작, 한곳에 주저앉아 손으로 해빛을 가리우듯 손채양을 하고 사방을 살피는 동작, 갈지자모양으로 걸으면서 두팔을 크게 벌려 짐승을 몰아가는 동작 등은 이 춤에서만 볼수 있는 고유한 춤동작들이다.
민속무용 《몰이군춤》에서는 이러한 춤동작들로 몰이군들의 특징적인 사냥활동과정을 생동하고 재미있게 형상하고있다.
이처럼 《몰이군춤》은 함경도 산간지대 인민들의 활달하고 락천적인 기질과 수렵생활을 반영한 지방적특색이 짙은 민속무용이다.
민속무용 《한삼춤》
《한삼춤》은 이름그대로 우리 인민의 민족의상에서 특징의 하나로 되여있던 한삼과 결부되여 생겨났으며 그것을 리용하면서 추는 민속무용의 하나이다.
한삼은 지난날에 두루마기, 창옷, 녀자들의 저고리 같은것의 두 소매부리에 손을 감출수 있게 얇고 깨끗한 흰천으로 길게 덧대는것을 말하였다.
한삼은 지난날 봉건귀족들의 옷차림에 많이 쓰이였으며 평민들의 혼례복과 여러가지 례식때 입는 옷에도 리용되였다.
《한삼춤》에 쓰이는 한삼에는 긴것과 짧은것이 있는데 긴것은 장삼이라고 하였다.
《한삼춤》은 지난날 궁중과 민간에서 많이 추어졌다. 궁중에서 추어진 《한삼춤》은 비록 그 내용이 비과학적인 현실을 반영하고있으나 춤형상에는 부드럽고 우아한 이 춤의 특징이 남아있었다.
민간에서의 《한삼춤》은 근로하는 인민들의 사상감정과 생활을 반영한 내용들로 이루어져있는데 민간탈놀이들인 황해도 봉산탈춤, 남해안의 오광대놀이 그리고 경기도의 산대놀이 등에 이 춤가락이 잘 살아나있다. 민간에서 추어진 《한삼춤》은 궁중에서 추어진 도식적이고 무거운 양상과는 달리 그 률동이 활달하고 약동적인것이 기본이였다.
《한삼춤》은 긴 력사적발전과정에 끊임없이 다듬어지고 정리된 자기의 독특한 기법을 가지고있다. 그 기법에는 한삼뿌리기, 한삼뽑아올리기, 한삼메기, 한삼휘젓기 등 여러가지가 있는데 기본이 한삼뿌리기이다.
어느 한 지방만의 고유한 풍속생활을 반영한 향토적인 민속무용과는 구별되는 《한삼춤》은 다양한 기법들로 하여 우리 민족무용의 서정성을 잘 표현하고있다.
《한삼춤》의 기법들은 민족가극 《춘향전》에 나오는 한삼춤과 무용 《쇠물은 흐른다》의 쇠물정춤에 잘 살아있는데 이것만 보아도 이 춤이 현대적미감에 맞게 다듬어지고 발전풍부화되고있다는것을 알수 있다.
민속무용 《창놀이춤》
《창놀이춤》은 함경북도 명천지방을 비롯한 그 주변일대에서 널리 추어진 민속무용이다.
곡식을 해치러 내려오는 산짐승들을 잡는 내용을 담은 춤은 근면하고 활달한 농민들의 생활을 잘 보여주고있다.
《창놀이춤》은 녀인들이 감자모를 옮기고 그것을 가꾸는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장면은 녀인들이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모를 옮기는 동작, 김을 매는 동작으로 엮어졌는데 김매기에서 두드러진 동작은 감자모에 북을 돋구어주는 동작이다.
이러한 동작은 감자밭을 가꾸는 농민들의 보람찬 로동생활모습을 실감있게 보여줌으로써 산간마을의 전경을 잘 살리고있다.
다음 《메돼지》로 분장한 사나이가 네발걸음으로 어슬렁거리며 등장한다. 감자밭을 파헤치며 이밭저밭을 온통 짓뭉개는 《메돼지》의 형상은 사람들의 격분을 자아낸다.
이때 마을 남정들이 참대창을 들고 기세좋게 나온다. 이어 춤이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남정들은 창을 머리우에서 휘돌리는 동작, 창이 몸에 휘감겨돌아가게 하는 동작을 비롯하여 연풍대동작, 손을 꼬아 휘두르는 동작 등 장끼동작들을 솜씨있게 보여주면서 사기충천하여 춤을 춘다.
한창 힘내기와 창쓰기동작을 보여주던 남정들이 비틀거리는 《메돼지》를 창으로 통쾌하게 찔러죽인다. 다음 죽은 《메돼지》를 가운데 놓고 남정들은 반쯤 앉아 발을 들면서 껑충껑충 뛰는 동작, 앉은채로 손벽장단, 무릎장단을 치면서 가볍게 뛰는 동작 등 독특한 춤가락들을 펼쳐보이며 기쁨의 감정을 토로한다.
다음 남정들과 녀인들이 한데 어울려 기쁨과 환희의 춤을 추는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처럼 《창놀이춤》은 땅이 척박한 산골에서 땅을 일구어 감자농사를 하며 살아가던 명천지방 농민들의 로동생활모습을 소박하게 형상하고있다.
민속무용 《절꺽춤》
민속무용 《절꺽춤》은 근면하고 락천적인 우리 인민의 생활을 특색있는 춤가락으로 형상한 무용으로서 여기에는 남성들의 호방하고 소탈한 풍모와 로동에 대한 희열이 진하게 어려있다.
《절꺽춤》은 평안남도 온천군을 비롯한 서해안지방들에서 많이 추어졌다.
지난날 우리 남성들은 땀흘리며 일하다가 쉴참이면 웃옷을 벗어던지고 땀에 젖어 번들거는 몸을 손으로 치기도 하고 두손바닥을 마주치거나 한쪽 손바닥을 다른쪽 겨드랑이에 대고 팔굽을 쳐서 절꺽절꺽 소리를 내면서 흥을 돋구군 하였다. 이러한 생활을 반영하여 나온것이 바로 민속무용 《절꺽춤》이다.
이 무용에서 가장 특징적인것은 그 제명에서도 알수 있는것처럼 손바닥이나 겨드랑이, 무릎관절이 꺾이는 부위 등 우묵한 몸부위들이 서로 마주칠 때 조성되는 공기압을 리용하여 절꺽절꺽 소리를 내는것이다.
손바닥으로 겨드랑이나 무릎꺾인 부위 등을 치면서 절꺽소리를 내는 춤동작은 다른 남성춤동작들과 결합되여 더욱 재치있고 활달하게 전개되여 참으로 볼 맛이 나고 절로 흥겨워진다.
웃옷을 벗은 남성들이 바지가랭이를 걷어올리고 나와 두다리를 쩍 벌리고 서서 장단에 맞추어 발을 척척 비껴짚으며 추는 이 춤은 로동생활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있지만 근면한 우리 인민의 슬기와 용맹을 잘 나타내고있다.
또한 이들이 집체적으로 내는 절꺽소리는 때로는 가락맞게, 때로는 웅장하게 안겨오면서 경쾌감과 통쾌감을 느끼게 한다.
민속무용 《절꺽춤》은 민족문화유산을 적극 발굴하고 계승발전시킬데 대한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교시에 따라 새롭게 발굴정리한 귀중한 무용유산의 하나이다.
민속무용 《수박춤》
《수박춤》은 자강도지방에서 널리 추어진 민속무용의 하나이다.
이 춤은 고구려시기부터 조선봉건왕조시기에 이르기까지 관병들과 서민계층속에서 널리 추어온것으로서 봉건통치배들과 상층무관들의 부패무능과 타락상을 폭로규탄하며 조소하는 생활감정을 반영하고있다.
당시 인민들과 관병들은 봉건통치배들의 무능과 부패함에 격분을 참지 못하여 가슴과 무릎, 땅바닥, 손바닥들을 치면서 자기들의 피맺힌 원한을 토로하였다.
《수박춤》은 이러한 춤가락들로 관병들의 위풍을 보여주는 춤장면과 오락장면 그리고 흥취있는 손벽치기춤장면들을 다양하게 구성하였다.
《수박춤》의 음악은 타령장단과 휘몰이장단에 의한 민요들이였으며 춤동작들로는 손벽과 가슴을 치는것이 주되는 동작이였다.
특히 이 춤을 출 때 전신 어디든지를 치고는 마지막 2박자는 반드시 손바닥과 가슴을 치는것이 특징이였다.
또한 무릎굽혀 앉아서 춤추는 동작을 비롯하여 조약동작 등 하반신동작들도 다양하였다.
이처럼 민속무용 《수박춤》은 그 내용이 인민적이고 진보적이였을뿐아니라 춤동작들이 다양하고 흥미있는것으로 하여 인민들의 사랑을 받으며 널리 추어왔다.
민속무용《봉산탈춤》
봉산탈춤은 우리 선조들이 창조한 우수한 민속무용의 하나이다.
봉산탈춤이 유명해지게 된것은 봉건사회에서 승려나 량반을 비롯한 착취계급들의 부화방탕한 생활을 특색있는 춤형상으로 아주 신랄하고 날카롭게 풍자조소한것과 관련되여있다.


봉산탈춤이 향토적색채가 짙은 민속예술형식으로 더욱 발전한것은 18세기부터였다.
당시 봉산지방은 민간예술인들의 주요활동거점으로 되였고 장거리들에서는 상품을 사러온 고객들 못지 않게 사당패나 광대패의 탈춤을 보러온 구경군들도 많았다고 한다.
탈춤에 대한 인기가 높아지면서 사당패나 광대패들을 초청하기가 어려워지자 이 지방의 관노들이 탈춤을 배워 해마다 공연하게 되였고 지방적특색이 짙은 민속무용으로 발전하게 되였다.
봉산지방 탈군들은 인민들의 정서적요구를 반영하여 승려들과 량반들을 풍자조소하는 개성이 강한 탈춤을 재치있게 형상하여 더욱 유명해지게 되였다.
봉산탈춤의 독특한 형상은 평양, 원산, 황주를 비롯한 여러 지방 인민들의 환영을 받았으며 그 지방 탈춤형상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봉산탈춤은 《탈춤령산》에 맞추어 추어지는데 모든 춤은 굿거리장단으로 시작하여 타령장단으로 마무리된다.
봉산탈은 종이탈인데 그 제작법을 보면 흙으로 만든 모형에 참지를 여러겹 발라 말리우고 색을 칠하며 탈면에 갖풀을 발라 윤기를 내였다.
봉산탈춤은 해마다 이른봄에 한번 공연하였으며 탈춤을 춘 다음에는 그 탈들을 태워버리는 관습이 있었다.
우리 인민들이 즐겨 춘 《칼춤》
칼춤은 검을 들고 추는 춤을 말한다. 일명 검무라고도 한다.
고구려벽화무덤들인 고국원왕릉, 장천제1호무덤에는 칼춤을 추는 모습이 생동하게 그려져있다.
칼춤은 17~18세기에 예술성이 높은 무용형식으로 널리 퍼졌다. 그것은 임진조국전쟁을 성과적으로 결속한 직후 우리 인민들의 드높은 애국심과 조국수호의 정신이 민간예술종목들에 적극 반영된것과 관련되여있다.

칼춤은 검술에서 쓰이는 여러가지 검법을 춤률동으로 재치있고 빠른 속도로 수행하면서도 검다루는 솜씨가 뛰여난 사람들만이 보여줄수 있는 높은 기교동작들을 삽입하여 그 형상성을 더욱 높이였다.
실례로 량손에 든 칼을 공중으로 동시에 높이 올리던졌다가 동시에 가볍게 받는 동작을 들수 있는데 이것은 칼에 완전히 익숙한 사람만이 수행할수 있는 높은 기교이며 뛰여난 검객들만이 보여줄수 있는 동작이다.
칼춤의 구성이 째이고 예술적으로 잘 형상되였다는것은 량손에 칼을 들고 휘두르기, 돌리기, 찌르기 등 다양한 칼놀림기법들이 수행되는 속에서도 상대의 몸에 칼이 닿는 일이 전혀 없었던것을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 인형공예 《칼춤》 –
칼춤을 보고 문인들은 글에서 《이리저리 휘둘러도 칼끝 닿지 않는구나》, 《적을 사정없이 찌를것 같더니 검이 몸에 못 미치니 겨우 한치도 못되였다.》라고 표현하였는데 이것은 칼춤장면 하나하나가 다 구성이 치밀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